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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편함] 면식범
[215호] 2021년 03월 22일 (월) 김선오 시인

  왜 어릴 적 영상이 여기 남아 있는 걸까.

  노이즈가 많습니다. 찢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화면은 흐리고,

  어린 나는 뒷목이 희고 모자를 썼습니다.
  피아노 학원은 비디오 가게를 지나면 나옵니다.
  골목에 떨어지는 빛을 따라 걷습니다. 나는 피아노를 배웁니다.
  여섯 살 때부터 배웠습니다.

  개가 짖습니다. 오선지가 찢어집니다. 학원에는 방이 여러 개 있습니다. 쇼팽 방, 모차르트 방, 드뷔시 방…… 방을 고를 수는 없습니다. 방은 선생님이 정해줍니다.

  오늘은 쇼팽 방이 비었습니다. 나는 드뷔시 방을, 왼손 아래 고장 난 건반들을 좋아합니다. 고치지 말아달라고 하자 선생님 얼굴이 붉어집니다.

  영상은 계속됩니다. 찍는 손이 자꾸 흔들립니다.

  소나티네를 연주합니다. 드뷔시 방의 피아노를 고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선명한 연주가 들립니다. 나는 좋아하는 방을 잃고

  좋아하는 애가 생겼습니다.

  그 애가 모차르트 방에서 피아노를 칩니다. 나는 밖에서 이론 공부를 합니다. 팔분음표를 열두 번, 높은음자리표를 여섯 번 그리는 날입니다.

  다 그렸는데 선생님이 없습니다. 모차르트 방에서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의자를 끌고 방 앞으로 갑니다. 문 높은 곳에 창문이 있습니다.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갑니다. 두 손을 두 눈에 갖다 댑니다. 너머로 그 애가 피아노를 칩니다. 치지 않습니다. 치다가 맙니다. 소리는 계속되는데 그 애는 앉았다 일어났다 다시 앉으며 불안해합니다.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갔는데

  의자가 넘어집니다. 나는 더 크게 넘어집니다.
  선생님이 들어옵니다. 나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 애가 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웃습니다. 괜찮아요, 저 진짜 괜찮아요.

  카메라를 든 손이 떨립니다. 선생님이 무릎을 살펴봅니다.

  전화벨이 울립니다.
  엄마, 이 영상 뭐야, 누가 찍은 거야?
  우리 집에는 비디오카메라가 없었는데……

  넘어진 의자가 제 힘으로 일어납니다. 모자 쓴 아이가 학원 밖으로 빠져 나옵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합니다.

  비디오 가게를 지나면 큰 길이 나옵니다. 좋아하는 애가 도로 위에 쓰러져 있습니다.
  선명하게 쓰러져 있습니다.
  그 애를 지나 뒷걸음질 칩니다.
  화면이 흔들립니다. 엄마가 전화를 끊습니다.

  그럼 이건 뭔데? 얘는 누군데?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햇빛이 아이의 발등으로부터 튀어 오릅니다.
  아이가 걸음을 멈춥니다. 뒤돌아 카메라를 봅니다. 환하게 웃습니다.
  거꾸로 웃습니다.

  눈이 마주칩니다. 나는 손짓합니다.
  이리 오라고 말합니다.

  괜찮아요, 저 진짜 괜찮아요.
  화면 속의 아이가 말합니다.
  수없이 말합니다.

<시인 소개>
시집 『나이트 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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