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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시선] 쓸모의 영역 밖에서
[215호] 2021년 03월 22일 (월) 이지현 편집위원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 속 영지 선생님의 대사를 이따금 곱씹는다.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적어도 하나는 있다는 것. 고작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일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영지 선생님 말처럼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고작이라고 치부될 만한 일에도 애쓰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왼쪽 엄지부터 오른쪽 엄지까지 차례대로, 손가락 하나씩 동그랗게 접었다가 다시 들어 올려본다. 힘을 주지 않은 느슨한 손가락 끝. 그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꽤 생경하다. 나는 이런 것들이 좋다. 아무짝에도 써먹을 수 없는, 쓸모의 영역에서 살짝 빗겨나간 잉여 같은 것들이 말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테두리가 유독 뾰족하다고 느낄 때, 그 뾰족함 위에 서서 이유 모를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면 두 손을 펴서 한 손가락씩 까딱거려보길 바란다.


  작년에는 걷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반나절 내내 걷기만 했던 날도 있다. 산책이라기엔 무겁고 그렇다고 운동이라기엔 민망한 수준, 딱 그 정도의 걷기. 방향성도 없이 들쭉날쭉하게 걸었다. 먼 곳까지 갔다가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 중요했다. 이미 지나왔던 길을 다시 밟아서 출발 지점으로 돌아간다는 감각, 그건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그걸 몸을 통해 느끼려 했던 것 같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나를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선명해지려 안달이 난 사람처럼 스스로를 설명하려 애썼다. 명징하고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는 것이 삶이란 걸, 수많은 파편의 집합이 나 자체가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다. 정확함이라는 것에 천착해 자꾸만 부연 설명을 했다. 그럴수록 꼬이는 느낌이었다. 내가 뱉은 말들과 내가 쓴 글들이 온통 변명 같았다.


  해가 갈수록, 배우면 배울수록 무언가에 대해 쉽게 말하기 힘들어진다. 판단은 자꾸만 지연되고, 가다가 계속 멈추게 된다. 그리고 멈췄을 때 드러나는 화살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내가 몰랐던 것들은 무엇이고, 감히 안다고 여겼던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개인들의 총합이 세계가 아니라, 나를 비롯한 수많은 타자들이 스며들어 있는 관계 자체가 세계라 배웠다. 우리는 우리를 어떻게 다르게 질문할 수 있을까. 애초부터 불가능한 도달에 대해, 실패를 예감하면서도 계속 도달하려고 하는 일. 그리고 무수한 삶의 감각 안에서 이해의 경계를 묻는 일은 나와 무관하다고 여겼던 타인, 그리고 나와 내가 속한 우리를 어떻게 다르게 상상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계속 잠시 멈추고 싶다. 그리고 그 멈춘 자리 위에서, 다 안다는 태도 대신 계속적인 질문을 쥐고 싶다. 나는 무엇과 접속할 것이며, 무엇과 제대로 마주할 것인가.


  쉽게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침묵만 유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언어로 쉽게 환원될 수 없는 것들까지 여전히 많은 것들이 어렵다. 그럼에도 극단적 회의주의나 무기력에 빠지지 않고 싶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영지 선생님의 마지막 물음에 섣불리 답을 내릴 순 없지만, 이왕 흔들릴 거라면 잘 흔들리고 싶다.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한 이 세계 위에서 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일. 어느 한 방향에 쏠리지 않도록 척추를 곧게 세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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