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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신유물론 관점으로 보는 코로나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215호] 2021년 03월 22일 (월) 박주영(박준영) 수유너머 104 연구원
   
  △ 사진출처 : Pixabay  

  코로나 바이러스가 최초로 출현했을 때를 상기해 보자. 많은 사람이 공포에 떨면서 종말론적 이미지들을 한 번씩 떠올리지 않았나? 지금은 어떤가? 사람들은 적어도 더 이상 이 세균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는 보편적인 악마와 같이, 또는 아렌트(Hannah Arendt)적인 ‘악의 평범성’과 같이 말이다. 그래서 세균이 담론 안에서 가지는 공포의 교환가치는, 간간이 찾아오는 부정맥처럼 넓고 고르게 퍼진 불안으로 꽤나 평가절하된 상태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은 최초 출현 시점에서 늘 일종의 컨벤션 효과 같은 것을 누리면서 가치 앙등을 겪지만, 그것이 다른 배치물들과 더불어 코드화 되고, 알고리듬 과정 중에 기입되면서 기본값에 적응하면 시초효과는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현상이 사람들의 헛소문이나 공포로 인해 부풀려졌던 거품이 꺼진다는 속류적인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바이러스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아니라, 잠재적이고 실재적으로 우리 곁에 있던 것이다. 그것은 헛된 것이 아니라, 가장 실재적이었지만, 우리의 시야에서 배제되었던 바이러스, 또는 이미 인간이 통제 가능하다고 여겼던 독감 바이러스와 유사한 것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변종’인 것은 그런 의미다.


  재우쳐 물어보자. 지금/여기 내부에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사실 이런 질문 방식이 신유물론적이다. ‘신유물론’(New-Materialism)은 물질적인 존재 자체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과연 그런 ‘본질’ 따위가 중요한가? ‘~은 무엇인가?’라고 백 번 묻는 것보다, ‘~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라고 한 번 묻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결국에 전자는 후자의 질문에 도달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므로). 오히려 카렌 바라드(Karen Barade)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다른 배치물들과 간-행(intra-action)하는 방식에 집중한다.


  따라서 보다 중요한 것은 바이러스의 본질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 세균체가 담론적, 정치적, 기술적 ‘체계들’(systems)에서 객체들과 상호 접혀 들어가는 운동양상(intra-plification)이다. 그렇다고 바이러스의 생물학적인 변이 가능성과 그것을 능가할 백신이나 치료제의 개발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공학적 과정들은 전체 배치와 운동 안에서 하나의 중요한 배치물로 기능하지만, 결코 우리의 일상적 삶 자체의 실질적인 내용까지 지배할 수는 없다. 다시 물어보자. 과연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된다고 해서 지금까지 나와 당신의 삶이 겪어온 팬데믹의 과정이 완전히 그 이전으로 회복될 것인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전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만큼이나 공허하다. 다른 한편 다소 이질적인 맥락에서, 팬데믹으로 한껏 상승한 ‘셀트리온’의 주식가치가 하루아침에 급락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똑같이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마치 팬더가 쿵푸를 배울 수 있다고 해서 모든 팬더가 쿵푸팬더가 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젝(Slavoj žižek)이 ‘오지심장파열권’을 들먹이면서 이번 기회에 공산주의를 전지구화하자고 하는 것은 너무 낙관적이어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서 말한 쿵푸팬더와 별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감벤(Giorgio Agamben)의 과감한 주장과 같이 팬데믹을 거의 국가자본주의 수준의 감시장치로 격상시켜 예외상태(l’état d’exception)를 정당화하는 부르주아 정부의 공중위생 전략으로 삼는 것은 너무 비관적이고, 음모론적이라 마찬가지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목적론이나 음모론은 공통적으로 바이러스라는 객체를 낙관적으로든 비관적으로든 과장한다. 실재와도 거리가 멀고 사람들의 체감지수와도 별 상관없는 예외상태에서 오지심장파열권을 연마하느니, 차라리 이제 막 사망자가 260만 명(국내는 1,600여 명)에 진입한 이 세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지금 바이러스 객체가 또 다른 객체들과 상호 접혀 들면서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효과를 달성하는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코로나 바이러스는 다른 객체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하다.’ 하지만 이 평등성은 “왕관을 둘러쓴 아나키”(들뢰즈) 상태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이 세계 내부에서의 평등성이므로 완전히 자본주의적이다. 다시 말해 저 평등한 바이러스와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계 ‘사이에서’ 뭔가가 발생한다. 이 사이에서 상호 접혀 들어가는 실재가 문제다.


  핵심적인 것은 여기 놓여 있다. 일상화된 악으로서 바이러스는 그 악이 초래하는 잔잔한 불안감과 더불어 임금 삭감, 실업, 파산 그리고 파업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권리의 응결 상태에 대한 하나의 무관심한 원인일 것이다. 이와 달리 다른 쪽에서 이 원인은 코로나 특수를 누리며 매출이 급상승하는 자본가들을 양산하면서 재계 순위 변동을 초래하기도 한다. 전 세계적인 정책 우선 관심 분야가 이 바이러스 객체로 인해 보건 위생에 집중되면서, 관련 부처의 행정 권력이 격상되는 것도 그 효과다. 마찬가지로 격리 상태의 지속이 여성과 빈곤층을 비롯한 소수자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더 문제는 이런 바이러스로 인해 회집된 코로나-사회체가 어떤 ‘지속불가능성’(unsustainability)을 시시때때로 암시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세의 페스트가 가진 그 ‘막대한 악’(tremendous evil)이라는 현행적(actual) 실재성과는 그 결이 다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완연히 잠재적(virtual)인 실재성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일종의 격발장치와 같이 사회체 곳곳에 적린(赤燐)을 심어 놓고 한 건물 전체, 또는 일가족 전체, 더 나아가 한 도시 전체를 코흐트 격리 체제로 만들어 태워버리고자 도사리고 있다. 사태가 악화일로에 있을 때 바이러스는 진정 생물학적이라기보다 ‘정보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즉 국가적 사태로 바이러스가 창궐하거나 그것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력이 드러나는 곳(예컨대 미국이나 브라질)에서는 어김없이 경제적인 정체와 문화적인 폐쇄 현상이 도래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객체들, 사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 우리 인간이 인류세(anthropocene) 기간 동안 해놓은 것은 광범위한 지배권력, 즉 오이케이오스(oikeios)라고 불리는 인간-자연의 일의적 시공간에 대한 지배권력의 확립이었다. 이 지배권력을 우리는 단적으로 ‘자본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대척점에 ‘사회주의’가 있(었)고 ‘공산주의’는 아마도 영원히 도래하는 어떤 것으로 존속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이항대립적인 구도 어디에도 바이러스를 위한 시공간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러스는 하나의 느닷없는 ‘사건’이 된다. 결국 이 구도의 주된 세력들은 전쟁의 한가운데 창궐하는 전염병의 인류세 안에서 좀비화된 셈이다.


  따라서 지금/여기 주도권은 인간-주체가 아니라 바이러스-객체가 쥐고 있다(결과적으로 인간-주체는 애초부터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모두가 객체다. 평등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부정맥의 정체는 이 찬탈 과정에 대한 직감이다. 일상적으로 동선이 변형되고, 일정표 안의 업무 과정이 왜곡되거나 삭제되는 현상 안에서 우리는 이 바이러스의 중력을 느끼는데, 이 중력은 그 어떠한 감압도 불가능한 지속불가능성의 세계 안에 우리가 비로소 초대되었음을 고지하는 것이다. 온통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이 개체군-바이러스는 막강한 객체로서 인간 존재의 능동성을 침범하면서 상호작용을 강요한다. 그 어떤 객체도 본래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오이케이오스 안에서 그동안 객체들의 위계를 강요하고, 착취의 수단으로 삼은 이데올로기들은 이 객체의 역습에 직면해서 완전히 해체될 위기에 처한 셈이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평등성은 사실상(de facto)의 것이면서 동시에 권리상(de jure)의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평등성이 ‘사실상’의 진실임을 자신의 권리, 즉 찬탈의 권리를 통해 입증한다. 죽음 앞의 평등과는 달리 바이러스는 죽음 앞에서 인간을 포함한 물질적인 객체들의 필연적인 상호작용을 드러내며, 이 가운데 죽음 앞에서의 ‘불평등’을 잔인하게 전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바이러스-객체는 그 불평등을 완연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객체들 또는 생명들의 평등성을 반증한다. 본래적인 평등성, 그 아나키한 본래면목을 말이다. 그렇다면 바이러스의 평등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사건적 실재는 다름 아니라 잔혹성(cruelty)일 것이다. 그간의 엄격하게 관리되고 주형되어 온 인간 신체와 윤리성의 우월성을 비틀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면서 ‘바이러스-객체-인간’이라는 새로운 주형 안에 세계관 자체를 밀어 넣는 잔혹성이 그것이다. 이 잔혹성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횡단-개체화’(trans-individuation) 과정이면서, 새로운 환경(milieu)의 발명에서 나오는 쾌락이기도 하다.


  우리가 팬데믹이라는 기존의 환경 안에서 새로운 환경을 발명할 때, 어떤 허무주의적인 관점을 내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관건은 지나친 낙관과 비관 같은 불필요한 관점을 에둘러 수행해 나가는 것이지 않을까? 종말론적으로 코흐트 격리를 전사회화 하는 것보다, 그리고 이 기회에 관념 속의 공산주의를 앞당기고자 시민들의 실재적인 죽음을 희화화하는 것보다, ‘인류 없는 미래’를 지속가능성의 일정 안에 기입해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바이러스-객체가 강요하는 저 객체의 보편적 능동성을 수용하고,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행히도 현재 우리는 인류세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는 멍청한 상상 따위는 하지 않으니, 이 환경의 발명은 일종의 필연적이고 기꺼운 과정이 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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