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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학생의 권리, 그를 생각하려면 고려해야 할 것
[196호] 2016년 06월 13일 (월) 서동진 계원조형예술대 교수, 문화평론가
   

대학교육의 문제는 학생의 권리만이 아닌 시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총체적 권리로서 바라봐야 한다. (출처: Getty Images)

 얼마 전부터 내가 일하는 학교에서도 결국 학원민주화를 위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취업기관으로 전락한 학교가 예술교육을 탐탁찮은 눈길로 흘겨보는 것도 모자라 숫제 정원을 줄이고 무리한 요구를 잇달아 제기한 탓이다. 마침 학교는 상의도 없이 예술계열의 정원을 빼서 문만 열면 입학생들이 줄을 잇고 취업도 잘 된다는 실용음악과를 개설하겠다고 서둘렀다. 무시당할 만큼 당했단 생각에 예술계열 교수들은 기업화된 대학을 만들어가는 학교 경영진의 방침에 항의하는 학원민주화 비상대책위를 만들었다. 학생들도 같은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 대자보를 붙이고 공청회를 여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는 지난 몇 년간 한국의 많은 대학에서, 비록 그 구체적인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자주 아니 매일 겪다시피 한 풍경의 한 자락에 불과하다. 대학입학정원이 급감하면서 지나치게 많은 대학들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인구통계학적인 산수는 단지 대학정원을 줄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대학 자체를 손보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구조조정이라는 계명은 대학 기업화를 위한 복음이 되었고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이나 예술은 마땅히 처리되어야 할 폐품처럼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인문학을 지켜야 한다는 소망은 석연치 않다. 지식의 계급적, 지배적 성격을 두고 성토하고 이데올로기니 헤게모니니 담론이니 하는 논쟁에 한참 열을 올렸던 시대를 떠올리면 낯 뜨겁기조차 하다. 인문학 자체를 살려야 한다는 말 속에 스민 기억상실도 우습고 무엇보다 그렇게 생존한 인문학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역시 아리송하다. 검색엔진을 돌리는 것이 지식을 얻는 최선의 방편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사려 깊은 해석과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회복하는 실천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일조차 버겁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화된 대학, 시장화된 대학이라는 상황 속에 놓인 학생들의 처지를 깊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학원민주화를 위한 토론회 자리에서 등록금을 냈으니 등록금 값에 해당하는 만큼의 마땅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에 열을 올리는 학생들에게 나는 학원민주화는 소비자운동은 아니지 않겠냐며 제법 거만한 충고를 했다.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혁을 주창한 이들은 학교라는 시장에서 공급자인 학교와 소비자인 학생들 사이의 관계라는 어법을 항상 들먹이곤 한다. 얼핏 듣기엔 학생들의 학습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기특한 생각처럼 보이지만, 이는 중등교육에 적용하자면, 더 좋은 대학에 보내줄 선생들을 택할 권리, 입시학원의 명강사를 초빙할 권리, 입바른 소리를 즐기는 전교조 교사를 물 먹이기에 딱 좋은 성과제를 도입할 권리 따위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소비자의 권리는 행복의 권리이지 진실에의 권리는 아니다. 물론 진리가 행복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처럼 진리와 행복이 멀리 떨어진 때도 없다. “그건 옳은 말이지만 그 말대로 살았다간 낭패 보기 일쑤”라는 냉소적인 지혜는, 진리란 게 행복을 망치는 거추장스런 장애물일 뿐이라고 처분한다. 나아가 진리는 어떤 특정한 욕구를 가진 사회 집단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평등이라는 가치가 진리인 것은 어떤 특수한 사회 집단에 속하는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된 지식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대학교육이 헛돌고 있다는 말을 하려면 그것은 학생의 권리가 아니라 시민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추구할 진리를 요구할 권리를 내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우리는 그를 판단해야하는 자리에서 주눅 들어있다. 

 총체성이란 개념처럼 오늘날 저주받는 개념도 없을 것이다. 총체성이란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고 정연한 유기적 질서를 부과하려는 오만한 이성의 책략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간주되곤 한다. 그리고 총체성을 도입하기 위해 애쓴 것들의 이름으로 신, 이성, 보편성, 서구, 남근(phallus) 등의 죄인들이 열거되곤 한다. 그렇지만 총체성을 힐난하고 비방하는데 거품을 물려면 우리 모두를 동일한 현실에 속하도록 주재하는 총체성의 화신인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상품과 화폐라는 가치(형태)는 인간의 물질적인 생존을 총체화하는, 신보다 더욱 강력한 신이다. 어쨌거나 시장이 교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한 이치이다. 마르크스 같은 이는 이런 상품과 화폐에 깃든 신을 물신(物神)이라 불렀다. 신은 죽었지만 물신은 활개치고 그것은 신 없는 세계의 신으로 군림한다.

 그렇다면 총체성이란 개념을 간단히 조롱하는 것은 허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총체성이란 개념은 그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그를 방해하고 위협하는 것을 억압하고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총체성이란 개념은 모순 혹은 이율배반 같은 개념을 소중하게 여긴다. 대학생이라는 지위를 이해하는 방편 역시 총체성이란 개념에 의지할 필요가 있다. 대학생은 특수한 사회적 신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총체성에 의해 좌우된다. 대학교육의 신자유주의화란 말에는 그런 총체성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담겨있다. 그렇지만 막상 학생이란 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총체성이란 말은 힘을 잃는다. 학생이란 이름이 오직 대학이라는 제도만을 상대하는 데 머무는 한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현실을 총체화하는 힘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란 모든 것을 물들이며 변용하는 힘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대학생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지배받는 자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대학생으로서 대학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골백번 생각해봤자,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총체성을 부정하지 않는 한 소득 없는 고민으로 그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멀쩡하게 내버려둔 채 대학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대학을 바꾸려면 그것을 좌우하는 총체성의 지배 그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 대학생은 시민이어야 하고 또 무엇보다 세계를 바꾸는 세력의 일원이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어렵고 귀찮더라도 무릅써야 한다. 그런 투쟁에 가담하지 않은 채 단지 대학을 욕하는 데 힘쓰는 것은, 무력한 히스테리적 몸짓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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