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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서평]지젝과의 대화
Slavoj Zizek and Glyn Daly, Conversations with Zizek, Polity, 2004.
[186호] 2014년 11월 03일 (월) 이 현 우 문학평론가

   사상가나 철학자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인터뷰나 대담이라고 믿는 편이다. 이론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경험적으로는 그렇다. 글로는 아무리 난해한 이론이나 사상이라 하더라도 저자의 육성을 통해서 걸러지면 덜 난해하다. 거꾸로, 말로도 이해가 안 되는 철학자라면 사실 읽어도 별 도움이 안 될 확률이 높다.
   슬라보예 지젝도 마찬가지다.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해주는 책은 인디고연구소에서 진행한 인터뷰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2012)인데, 그와는 별도로 참고할 만한 책이 글린 댈리의 『지젝과의 대화』(2004)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2013)란 제목으로 영어본이 나왔지만 『지젝과의 대화』는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 ‘공동선’이란 주제에 주로 초점을 맞춘다면 『지젝과의 대화』는 지젝 철학의 형성 과정과 주요한 개념 이해에서부터 지구화 시대의 정치까지 더 폭넓게 다룬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읽을 수 있다.
   자연스레 갖게 되는 질문. 지젝은 언제 철학자가 될 결심을 했을까? 그의 첫 선택은 철학이 아니라 영화였다. 영화를 빈번한 철학적 분석과 정신분석 개념의 적용 사례로 다뤄온 점에 비추어보면 놀랄 일은 아니다. 열서너 살의 지젝을 영화로 이끈 건 히치콕의 <사이코>와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인데, 이 두 편의 영화를 지젝은 열다섯 번 이상 보았다고 한다. 그 여파로 8밀리 카메라로 20-30분짜리 영화를 만들어보았지만 실패작이라 여기고 폐기한다. 영화에 대한 최초의 매혹과 뒤이은 상실감을 대체한 것은 열다섯 살 무렵에 읽은 마르크스주의 정전들이었다. 이어서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 잡지에 몰입하고 하이데거철학에 끌리며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을 발견한다. 그에게 하이데거에서 떠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데리다였는데, 지젝은 『그라마톨로지』의 첫 두 장을 슬로베니아어로 번역하여 발표까지 한다. ‘하이데거와 데리다 사이’가 철학자로서 그의 첫 포지션이었다.

   70년대 초에 하이데거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대 부르주아 철학’ 담당교수로 내정되지만 지젝은 슬로베니아 당국에 의해 불온한 인물로 간주돼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한다. 이것이 그에겐 전화위복이 되는데, 조국에서는 아무런 직업적 전망이 없던 터에 라캉의 사위인 자크 알랭 밀레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밀레를 슬로베니아로 초빙하여 정신분석과 문화에 대한 성공적인 콜로키움을 개최한 것이 계기였다. 이미 70년대 말에 친구인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만들어서 활동할 정도로 라캉정신분석에 친숙한 지젝이었지만 밀레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비로소 라캉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헤겔을 통해 라캉을 읽고, 라캉을 통해 헤겔을 읽는 지젝 특유의 철학이 형성되고 지적 도약이 이루어진다.
   영어권에서 지젝의 이름을 널리 알린 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이지만, 그보다 먼저 불어로 나왔던 학위논문으로 내용이 2/3 가량 중복되는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환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히트작이 된 건 내용이 아니라 적절한 자리 때문이 아닌가라고 추정한다. 때마침 필요한 책이 나온 것. 지젝의 책은 대학사회에서 정교수가 아니라 대학원생이나 시간강사 같은 ‘노동계급’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그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지젝과의 대화』도 바로 그 노동계급의 구성원들에게 특히 어필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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