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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권력 경계 밖에 선 문맹(文盲)의 호모사케르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김재혁 옮김, 이레, 2009
[176호] 2013년 03월 18일 (월) 김 주 일 현대불교신문사 취재부장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언어학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남녀 주인공인 한나 슈미츠와 미하엘 베르크의 대화가 온전하게 소통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소설 초반에는 미하엘이 화자(話者)이고, 한나가 청자(聽者)이다. 이때 둘의 대화는 책을 읽고, 그것을 들음으로써 이뤄진다. 책 읽기가 끝나면 정사를 나눈다는 점에서 둘의 대화는 일종의 성행위의 선행 조건으로도 보인다. 이제 갓 육체적 성애에 눈 뜬 미하엘이 조금이라도 더 한나와 침실에 같이 있고 싶어서 오랫동안 책을 읽는 장면에서는 그 혐의가 더욱 농후해진다. 미하엘에게는 발화(發話)와 발기(發起)의 욕구의 경계가 모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행위에 책 읽기 행위가 개입되면서 둘의 관계가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옮겨진다는 사실이다. 둘은 성교육을 가르치고 배우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으나 점차 연인의 관계로 발전해나간다.

소설의 중반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관계가 뒤바뀐다. 한나는 전범재판의 피고(被告)이고, 미하엘은 재판을 견학하는 법대 대학생이 된 것이다. 한나의 언어는 법정의 변호라는 규범적 커뮤니케이션에서만 가능한 언어이므로 사실상 ‘독백’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 보니 미하엘은 한나의 말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할 수는 없다.

소설의 말미에서도 둘의 대화는 끝내 단절된다. 미하엘이 한나에게 녹음테이프를 보낸다. 그것을 들으면서 한나는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다. 미하엘의 말(言)이 감옥의 장벽을 거쳐서 한나에게는 글(文)로 바뀌는 것이다. 편지를 주고받으면 둘의 대화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한나가 보낸 편지를 미하엘이 읽지 않는다.

이처럼 둘의 대화에는 항상 장애물이 있다. 초반에는 한나가 문맹인 것이, 중반에는 한나가 피고라는 것이, 말미에는 한나가 수인(囚人)이라는 것이 장벽 역할을 한다. ‘문맹-피고-수인’이라는 순차적이고 점층적인 한나의 신분변화에서 알 수 있듯, 한나에게는 글을 읽지 못하는 것이 일종의 원죄라고 할 수 있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에서 주권권력의 경계 밖에는 벌거벗은 생명인 호모 사케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더 이상 정치권력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근대 민주주의 탄생 과정에서도 호모 사케르는 철저히 배제됐다. 그 이유는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주권의 역설’에 의거한다. 언제라도 외부와 내부의 경계는 제도 권력에 의해 상정될 수 있는 게 법의 테두리인 것이다.

주권권력의 경계 밖으로 밀려났다는 점에서 한나는 전형적인 호모 사케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나는 나치즘의 하수인이기에 법정에서는 가해자로 서 있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로고스(Logos)이다. 재판과정에서 한나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함에도 문맹인 까닭에 무기징역형을 받는다. 그녀는 기소장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폭격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가 쓴 책도 읽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디아스포라(Diaspora) 다시 말해, 뿌리 없이 떠도는 영혼이다. 작가가 한나를 독일본토 출신이 아닌 헤르만슈타트 근교 출생으로 설정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나는 가족도 친척도 없었으므로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긴 채 떠도는 부평초처럼 살아야 했다.

소설 속에서 한나가 제복을 선호하는 것도 제도권 내에 편입되고 싶은 욕구로 해석된다. 그녀가 재판 판결이 있는 날 마치 제복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정장에 흰 블라우스를 입은 것도, “전차 차장 일이 마음에 드는 까닭은 제복을 입고 활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나에게는 피붙이 하나 없는 자신을 보호해줄 ‘경계’가 필요했고, 제복을 그 경계의 대용물로 여겼다고 볼 수 있다. 정작 그 제복이 자신과 똑같은 ‘디아스포라’이자 ‘호모 사케르’인 유대인들을 절멸시키는 제국주의의 복장인 줄 알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한나의 감옥과 유대인의 수용소는 주권권력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이들의 처소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아울러 이름을 박탈당하고 숫자로 불려짐으로써 인간이 아닌 사물로 취급받았던 유대인과 애초 문맹이어서 글을 쓸 줄 몰랐던 한나는 동일하다.

한나가 수용소 수감자들에 대한 동질의식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죽은 그들이 자주 수용소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이 찾아왔다는 것은 한나의 기억을 통해 현존하게 됐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한나가 감옥에서 읽은 서적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한나의 책꽂이에는 프리모 레비, 엘리 비젤, 타데우스츠 보롭스키, 장 아메리 등 희생자들이 쓴 글과 루돌프 회스가 쓴 자서전적인 글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보고서, 강제수용소에 대한 학술적인 글들이 있었다.

소설에서 가장 큰 의혹은 한나의 편지를 받고도 미하엘이 왜 답장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해답은 바로 ‘유예(猶豫)’에 있다. 법적으로 유예란 어떤 사건 결정이나 집행을 미루는 것을 일컫는다. 유예된다는 의미는 다의적이다. 일견 당장 판결이 효력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죄를 축소시키고 면피시키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반면 판결을 유보한 채 뒤로 미룬다는 점에서는 죄를 과중시키고 지속시키는 것으로도 보인다. 이런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은 ‘유예’는 집행은 미뤄지는 반면 죄는 정지되기 때문일 것이다.

정지된 채 지속된다는 것, 그것은 모든 기억이 지닌 기본 성질이기도 하다. 여기서 ‘기억’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말한 ‘양심의 부름’에 화답하는 ‘상기(想起, Amamesis)’를 일컫는다. 역설적이게도 한나와 미하엘의 대화도, 한나와 피해자들의 대화도 그 기억 속에서만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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