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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히 들려오는 첫사랑의 흥얼거림, 여름을 태우는 소리”
콘도 요시후미 <귀를 기울이면> : 보편적인 소인 소재를 영원불멸의 다이아몬드로 다듬어...
[175호] 2012년 11월 19일 (월) 송 경 원 영화평론가

   
   △ <귀를 귀울이면>
   
 
때론 영상보다 오래 기억되는 테마음악이 있다.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된 둘을 구분 짓고 나눈다는 게 의미 없는 일이란 건 알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나보다. ‘콘트리 로드’가 그런 영화음악이다. 존 덴버의 유명 포크송 ‘Take Me Home Country Road’ 가 아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대표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에 나오는 혼나 요코가 부른 ‘콘트리 로드’다. (‘Country Road’도 아니다. 반드시 ‘콘트리 로드’로 읽어야만 한다.)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개사해서 다른 가수가 부른 것 뿐 이건만 이 유명한 명곡은 전혀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태어난다. 존 덴버의 노래가 황토바람의 시골길을 연상시킨다면 <귀를 기울이면>의 ‘콘트리 로드’는 녹음 짙은 우리네 시골을 떠올리게 만든다. 눈을 감고 이 노래를 듣다보면 어느새 어린 시절 좁은 골목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골목길을 지나 나오는 야트막한 언덕 위로 올라가면 한 눈에 들어오는 정감어린 동네 풍경, 익숙한 바람 내음, 여름이 타는 소리. 이 노래에는, 그리고 이 애니메이션에는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고향, 추억, 첫사랑이란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그리움에 대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담겨 있다. 

내용은 흔하디흔한 첫사랑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소녀 시즈쿠는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 좋아하는 책을 실컷 읽기로 마음먹는다. 매일 마을 꼭대기에 있는 도서관을 제 집 드나들 듯 방문하며 책을 빌리던 그녀는 자신보다 늘 한발 앞서 책을 빌려가는 세이지란 이름을 발견하고 흥미를 가진다. 어느 날 아버지의 도시락을 전해주러 가는 길에 지하철에 혼자 탄 고양이를 발견한 그녀는 신기한 마음에 고양이를 따라가다 한 골동품 가게에 들어서고 그 곳에서 바이올린을 만들고 있던 주인 할아버지와 손자를 만난다. 소년의 이름은 아마사와 세이지. 사춘기 한 가운데에서 장래를 고민하고 꿈을 키워가던 두 사람은 점차 서로에게 사랑을 느낀다. 시즈쿠는 바이올린 장인으로써의 확고한 미래를 꿈꾸는 세이지에 자극 받아 망설이던 작가의 꿈을 현실로 바꾸기로 결심한다. 이탈리아 연수를 떠난 세이지가 돌아올 때까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시즈쿠. 그렇게 애니메이션은 그녀의 상상력 넘치는 소설세계와 현실을 조금씩 포개며 성장이란 이름의 순수를 보여준다.

매번 느끼지만 문제는 소재의 기발함에 있지 않다. 다이아몬드는 원석일 때도 여전히 다이아몬드인 까닭에 아무리 반복되어도 그 빛이 바랠 일은 없다. 장인의 손길을 거치면 두고두고 꺼내볼 보석이 되고 자칫 잘못 다루면 그냥 돌덩이가 되고 마는 것처럼 결국 중요한 건 이 보편적이고도 매력적인 소재를 어떻게 가공할 것인가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귀를 기울이면>은 영원불멸의 다이아몬드로 훌륭하게 다듬어졌다.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콘도 요시후미 감독은 장편 데뷔작이기도 했던 이 영화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후계자이자 지브리의 희망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갑작스런 사후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한동안 갈피를 잃고 방황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역량이 지브리, 아니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단 한 편의 작품만으로 이미 대체 불가능한 존재감을 남긴 것이다. 아마도 그는 진부하고 담백한 이야기를 특별한 순간으로 바꾸는 마법의 주문을 알고 있었나 보다. 비결은 다름 아닌 공감과 디테일, 관객 각자가 품고 있는 순수한 기억의 환기에 있다.

<귀를 기울이면>은 첫사랑과 성장이라는 소재로 뽑아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애니메이션이다. 지브리가 재현한 골목길, 담벼락, 도서관, 거리 곳곳은 처음 보는 낯선 곳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온기가 묻어 있다. 영화 초반 시즈쿠가 도서관을 찾아 올라가는 장면은 시즈쿠가 고양이를 따라가다 소설 속 상상의 나래로 들어서는 환상적인 장면과 다를 바 없다. 이 순간 관객은 각자 자신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간다. 모두의 기억에 잠들어있을 어린 시절, 순수한 눈으로 바라봤던 골목길의 주름이 화면 곳곳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귀를 기울이면>의 화면은 이미 마법이다. 어린 시절 유난히 커보였던 골목길 풍경, 모퉁이를 돌아서면 나올 것 같은 두근거리는 모험의 세계, 위성지도나 스트리트뷰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길 위의 촘촘한 주름은 떨리는 펜 끝에서 생명으로 되살아난다.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바로 나올 것 같은 그 시절의 순수한 꿈과 기억들이 한 장 한 장 손으로 그려진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 곳은 알 수 없는 환상의 나라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지나온 순수라는 이름의 마법의 세계다.

귀를 기울여 가만히 길의 노래를 들어보자. 담벼락에 새겨진 시간의 흥얼거림을 만져보자. 아마 당신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콘트리 로드/ 이 길을 계속 걸어가면/ 그 마을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콘트리 로드’. 꿈 많은 문학소녀 시즈쿠가 부르는 ‘콘트리 로드’는 바로 그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주문이다. 흥얼흥얼 따라 부르다보면 어느새 그 시절의 골목길 한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작은 일에도 흥분하고 막연한 미래를 두려워했다가 금세 환히 웃기도 한 순수했던 나의 사춘기.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때의 영롱한 빛이 화면 위에 펼쳐진다. 부쩍 쌀쌀해진 요즘, 가슴 한구석이 쌀쌀해진다면 <귀를 기울이면>을 통해 골목을 가득 메운 여름 태우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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