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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유괴당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
구로사와 아키라 <천국과 지옥> : 아동 유괴라는 범죄를 사회적 현실과 연결시켜
[173호] 2012년 09월 17일 (월) 송 경 원 영화평론가

 

   
      △ 구로사와 아키라, <천국과 지옥>
   
 

 

흉흉한 세상이다. 강력범죄야 매년 있어 왔지만 올해 뉴스를 장식하는 참담한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 보면 마음마저 황폐해질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아동 성폭력 사건과 묻지마 범죄들은 비단 개인의 인성이나 도덕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최근 이 아동 성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를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불현듯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거울이 될 만한 일본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자타공인 일본 영화계 최고의 거장 중 한 사람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천국과 지옥>(1963)이 바로 그것이다. 구로사와 감독의 대표적인 현대극 중 하나인 이 영화는 <이키루>(1952)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거장 감독의 영화적 야심을 읽을 수 있는 걸작임에 틀림이 없다. 

신발제조회사의 중역 곤도(미후네 토시로)는 회사의 경영권을 얻기 위해 평생을 모은 전 재산을 회사에 투자하기로 결심한다. 회사를 자부심과 장인정신을 지닌 곳으로 발전시키고 싶었던 곤도는 주변의 우려와 만류에도 아랑곳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아들이 납치되고 범인은 곤도에게 엄청난 몸값을 요구한다. 범인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회사를 포기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빠진 곤도. 하지만 회사냐 아들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던 곤도에게 곧 새로운 소식이 날아들면서 사건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범인 착각을 하고 자신의 아들 대신 운전사의 아들을 납치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곤도는 처음에는 안도하지만 이내 다시 고민에 빠진다. 곤도가 회사를 가질 것이냐 죄 없는 아이를 살릴 것이냐를 놓고 갈등하는 가운데 형사 주임 도쿠라(나카다이 다쓰야)는 범인과의 거리를 점차 좁혀간다. 

 기본적으로 아동 유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형사영화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천국과 지옥>은 개봉 후 평단과 흥행의 고른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10년형 정도에 불과했던 유괴 범죄의 미미한 처벌을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도록 강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정서적 공감대를 끌어내는 탁월한 만듦새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범죄에 대한 분노를 특정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쏟아낸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 전반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질문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윤리적인 자문을 하게끔 만든다는 점이다. 영화는 아동을 납치한 범인을 단순한 악으로 치부하고 징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던진다. 이것은 범인에게 쉽게 동정표를 주는 여느 드라마와는 궤적을 달리한다. ‘아동 유괴’라는 용서 받기 힘든 사회적 사건과 돈과 생명, 혹은 자본과 인간의 가치와 같은 선택의 문제를 등치시키며 이것이 단순한 개인적 윤리 차원에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에드 맥베인의 <왕의 몸값>을 각색한 이 영화는 선과 악으로 대변되는 보편적인 윤리의 문제와 당시 일본 사회의 현상들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며 작품 내내 조밀한 긴장감과 갈등의 딜레마 속으로 관객을 동참시킨다. 

영화의 구성은 아동 납치가 일어나는 전반부와 범인의 뒤를 쫓는 후반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선택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친 인물의 심리드라마에 집중한 전반부는 미후네 토시로가, 범인을 추적하는 형사스릴러에 가까운 후반부는 나카다이 다쓰야가 각각 중심에 서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인 동시에 연기인생의 정점에 올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두 명배우는 절제된 연기로 인물의 치밀한 심리를 묘사하며 작품의 긴장감을 높인다. 두 배우의 각기 다른 연기 톤은 마치 두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여느 영화들과는 다르게 이 불균질한 결합이 도리어 절묘한 리듬감을 형성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적 야심을 읽을 수 있는 이 작품은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들을 연상시키는 서스펜스적인 구성과 미장센으로 가득 차 있다. 관객마저 갈등에 휩싸이게 만드는 설정을 기본으로 각 시퀀스의 장면들이 마치 한 편의 잘 짜진 연극을 보는 것 같이 철저한 계산 속에 배치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고전이란 그저 오래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의 풍화에도 불구하고 빛바래지 않는 ‘정답’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2.35 : 1의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쓰고 있는 이 영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와이드스크린의 스펙터클을 남김없이 활용하고 있다. 대부분 좁은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전반부를 보면 의외로 컷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걸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롱테이크처럼 심심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이는 일부러 컷을 통해 쉽게 공간을 자르지 않고 인물의 동작과 동선을 활용해 좌우로 넓은 화면을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설계된 미장센이다. 의미 없이 좌우로 넓기만 해 공간을 낭비하는 최근 영화들의 헐거움과 비교하면 얼마나 정교한 계산 하에 인물들을 통제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연출이다. 실제로 이 같은 연출과 구성의 조밀함은 고스란히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긴장감과 직결된다. 그야말로 형사스릴러 영화의 교과서라 할 만하다. 60년이 지나도 촌스럽기는커녕 오히려 그 정교함과 치밀함에 반하게 되는 <천국과 지옥>은 이 영화가 당시 시대상황에서 화두를 던졌기 때문에 기억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재료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요리했느냐 아닌가. 사람의 감정을 뒤흔드는 거장의 솜씨는 영화가 던진 질문을 사회적 논의로 확장시키는 힘이 있다. 아동 성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하는지 아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을 보며 오늘날 한국 사회의 아동 성범죄를 단순한 개별 사건에 국한시키거나 그저 자극적인 가십꺼리로 다루지 않는 통찰력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영화는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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