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0.5.25 월 09:54
인기검색어 : 코로나19, 등록금 반환,
신문사소개 | 호수별 기사보기
> 뉴스 > 학술 서평 > 서평
     
‘그래도 난 인생이 좋아’라고 말하기 위하여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1994
[173호] 2012년 09월 17일 (월) 최 진 영 소설가

내가 쓴 글을 보면서, 불필요한 문장이 왜 이리 많을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쓸 때는 분명 많은 공을 들인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읽을 때면 속속 숨어 있는 생뚱맞은 문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마다 죽 이어진 기차 객실 사이에 끼어 있는 세발자전거나 오리 보트 따위를 본 것처럼 당혹스럽다. 글만 그런 게 아니다. 생활 속의 말도, 행동도 그렇다. 불필요한 말과 행동이 너무 많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일 천지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이 등장하는 말이나 행동, 문장은 없다. 모든 것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만들어 낸 원인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그 관계를 알아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오랫동안 듣고 보는 것.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말과 말, 행동과 행동 사이에 놓인 수많은 모세혈관을 차근차근 따라가 보는 것. 상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린 서로를 한 권의 소중한 책처럼 오래, 자주 들춰 봐야 한다.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스물세 살에 진이정 시인의 시집을 처음 읽었다. 대학 졸업반이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던 때였다. 침체되어 있었고, 취약해져 있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어서,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만 빼 읽으며 남의 생각, 남의 삶만 기웃거렸다. 그의 시를 읽어 본 적도, 그의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었는데, 시집 제목에 끌려 시집을 뽑아 들었다. 그 시집은 시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었다. 그것을 며칠에 걸쳐 드문드문, 하지만 지속해서 읽었다.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끝까지 읽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결국 끝까지 읽어 버린 뒤 생각했다. 이 시집엔 불필요한 문장이 단 하나도 없다고. 그리고 또 생각했다. 이 책에 실린 각각의 문장은 모두가 온전한 하나의 시(詩)라고.

사랑이 끝나갈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세 문장이 있다. ‘내 인생은 기울고; 해도 기울고/ 절망 아니면 희망이겠지; 변해 가는 건 변해 가라지/ 사랑의 불, 인연의 재, 그리고 권태만이 남으리라(「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2」 중)’ 더불어 다른 문장도 둥실둥실 떠다닌다. ‘바다도 없이, 바다도 없이, 나는 항해한다.(「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 」중)’ 살아서 사랑하고 변해 가고 절망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어차피 누구나 죽으니 인생은 결국 비극이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난 인생이 좋아(「나의 희망엔 아직 차도가 없다」 중)’라고 말하기 위해 던져야만 하는 수많은 질문과 번뇌가 진이정 시인의 시를 가득 채우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집착과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실체도 자성(自性)도 없는 공(空)을 깨달으면 해탈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아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며, 그 결과로 희망보다 절망을 더 많이 겪어야 한다. 시인은 절망과 허무를 견딜 수 없어 시를 쓰면서도, 희망 또한 놓지 않고 담담하게 말한다. ‘지난 세월이 흥미진진했더라면 그건 히로뽕처럼 유해했으리라/ 그래 그냥 사는 것이다 알 수 없는 그리움에 마음 털리며(「생일」 중)’ 시인의 희망은 해탈이나 자유가 아니다. 해탈 너머의 그리움이다. 무한한 우주의 역사 속에서, 언젠가는 나였을 너에 대한 그리움. ‘기껏 그리움 하나 때문에 윤회하고 있단 말인가(「엘 살롱 드 멕시코」 중)’ 시인은 그리움이란 희망을 놓을 수가 없어 윤회의 쳇바퀴에서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힘들게 받아들인 희망을, 죽음 앞에서도 놓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건 한 사람의 인생을 읽는 것과 같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내겐 이 시집이 그런 책이다. 그리고 아직, 그런 책을 더 발견하진 못했다. 시집에 실린 마흔 편의 시엔 많은 문장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그 문장을 ‘요설’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시집에 실린 문장들은, 시인의 마음을 점령했을 숱한 문장에 비하면 티끌만큼도 안 될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시루에 빽빽이 들어찬 콩나물처럼,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들어찬 문장들 틈에서, 정말 꺼내 놓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문장만 시인은 꺼내 놓았다. 그것이라도 꺼내어 숨을 쉬려고.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려고. 벙긋, 입이라도 벌려 보려고. 그래서 단 하나의 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짧은 시 한 편을 읽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한 줄, 한 줄, 넘어가기가 힘들었다. 인생의 고비를 넘어가듯, 그랬다.

마음이 뒤집힐 때마다 꺼내 들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진이정의 시집을 꼭 쥐고 이십 대를 보냈다. 삼십 대 역시 그렇게 보낼 것이다. 버림받을 때, 허무할 때, 사는 게 뭔가 싶으면서도 사랑을 원할 때, 갈구할 때, 욕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그리워할 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이 다시 허망해져서, 나는 대체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먹먹해질 때, 그의 문장을 주문처럼 외우며 견딜 것이다. 하얗게 질린 손끝이 무감해질 만큼, 그의 시집을 단단히 움켜쥔 채로.

ⓒ 동국대학원신문(http://www.dgugspres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페이스북 방문해 주세요!
더 많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육방송국 동국대학원신문 동대신문 동국포스트
동국대홈동국미디어컨텐츠 센터동대신문교육방송국동국포스트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4620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 1길 30 동국대학교 학술관 3층 대학원신문 | 전화 : 02-2260-8762 | 팩스 : 02-2260-8762
발행인 : 윤성이 | 편집인 : 이경식 | 편집장 : 김태환 | 발행처 : 동국대학교 대학미디어센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경식
Copyright DGUGSPRES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gupress@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