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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고서도 풍경을 만나는 방법
김유진, 『여름』, 문학과 지성, 2012
[172호] 2012년 06월 11일 (월) 신 샛 별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 문학평론가

눅진한 바람과 메마른 열기가 교차로 엄습해오는 계절, 바야흐로 여름이다. 올해는 여름이 서둘러 찾아와 뒤늦게 떠난다니, 기나긴 여름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청명한 숲의 산뜻한 공기가 그리워 벌써부터 피서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정직하게 더위와 씨름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김유진의 소설집 『여름』을 잠시 품어보는 것도 좋겠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단정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가 특장인 작가와 더불어 생경한 풍경을 마주하는 여행의 순간들을 경험할 수 있다.

김유진의 소설이 여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그녀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여행 중이거나, 과거의 여행을 회상하는 중이다. 가령 「바다 아래서, Tenuto」의 주인공 K의 여행을 따라가 보자. “그는 어린 시절 단 한 차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무려 여섯 시간 동안이나 기차를 탔다고 했다. 기차 안에서, 그는 처음으로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을 맛보았다. 그는 마지막 초콜릿을 혓바닥에서 조심스럽게 녹였다. 아몬드를 손바닥에 뱉었다. 땅콩보다 두 배는 큰 데다 나무둥지처럼 고운 결이 있었다. 그 결들 덕분에, 아몬드는 땅콩보다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나는 거라고 K는 추측했다”(20쪽).

상경하는 기차 안에서 아몬드가 들어간 초콜릿을 가만히 머금어 보았던 어린 시절의 K는 어머니를 따라 “천장이 엄청나게 높은 교실 같았던”(25쪽) 어느 방에 도착한다. 그 방에 있던 낯선 남자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피아노 실력을 한껏 뽐낸 K에게, 아마도 어머니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성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K는 어떤 이유에선지 그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그 여행은 K에게 어머니와의 완전한 이별의 순간으로 기억된다.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에 등장하는 표현을 빌리면 ‘도시의 감미’에 다름 아니었을 기대에 부풀었던 어머니를 실망시켰다는 죄책감 속에서 K는 평생을 “무기력하고 무능”(30쪽)하게 살아간다. “머리가 희끗한 늙은 소년”(31쪽)이 되어서도 친구라고는 어머니밖에 없었던 K에게는, 단 한 번의 여행이 실패를 인정하고 현재의 삶에 몰입해 재기하는 것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이 된 셈이다.

「바다 아래서, Tenuto」를 비롯해, 「희미한 빛」의 지방으로의 여행, 「우기」의 해외여행, 「A」의 수련회, 「물보라」의 맛집 탐방까지, 김유진의 소설에는 여행이 서사의 중심에 자리한다. 그 덕분에 풍경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관심은 다분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여행이란 기실 풍경과의 만남을 위해, 부러 일상으로부터 일탈하는 모험이 아닌가. 여행 도중에 한 그루의 나무, 널찍한 길, 옷깃을 스치는 바람처럼, 평소에는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일상의 세목들이 새삼 범상치 않게 느껴진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하나의 풍경으로 객관화되는 시간, 동시에 그 풍경과 한없이 동떨어져있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시간, 말하자면 여행은 거리(distance)를 통해 사유를 이끌어내는 시간이다.

이때 ‘나’와의 거리를 전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풍경은 영원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타자, 이를테면 사랑의 대상으로 유비될 수 있다. 그래서 김유진의 소설들은 연인과의 갈등을 서로 다른 풍경을 배후에 두고 있는 두 사람의 만남으로, 또는 풍경들끼리의 충돌로 이야기한다. 여기, 지방의 한 소도시로 여행을 간 연인이 있다. ‘나’는 차창 밖에 펼쳐진 “여름 산과 싱싱한 벼, 야생화, 드물게 남아 있는 흙집이나 차양을 친 인삼밭”(50쪽)의 풍경을 ‘B’와 나누고 싶다. 그러나 연인인 B는 그런 풍경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는 카드 결제를 마다하는 시골의 시장에서 시종 강경하고 합리적인 태도로 맞서는 사람이다. 그런 B의 태도가 몹시 부끄러운 ‘나’는 이제 “그를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56쪽)다고 말하고만 싶다. 「여름」에서 B가 추억하는 잘 익은 체리의 맛을 Y는 “달고 사근사근한 맛”(79쪽) 정도로만 짐작할 수 있는 이유 역시, 사랑은 각자의 풍경을 마음에 품은 사람들끼리의 불완전한 만남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아무리 사랑해도 그가 홀로 견뎌낸 시간, 그 시간이 조성해 놓은 마음의 풍경에 선뜻 다가가기란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소설집의 후반부는 서로의 풍경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불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A」에서 비교적 잘 드러나고 있듯이 성장서사의 문법과도 상통한다. 숱한 갈등을 겪으면서 사랑을 키워가듯, 두려움을 무릅쓰고 마음의 풍경을 전복시켜 나갈 때 인간은 비로소 성장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자전소설로 발표된 「나뭇잎 아래, 물고기의 뼈」의 한 구절, “나는 한곳에 오랫동안 터를 잡는 것도, 유랑민처럼 여러 곳을 떠돌며 사는 것도,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서서히 받아들였다”(220쪽)는 정착과 유랑의 반복이야말로 삶이 아니겠느냐고, 삶은 여행이며, 따라서 항상 낯선 풍경과의 위험한 만남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라고 반복해 말한다.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이상은의 <삶은 여행>이라는 노래가 귓가를 맴돌았다. 시를 닮은 노래의 한 구절을 옮겨 본다. “삶은 계속되니까 수많은 풍경 속을 혼자 걸어가는 걸 두려워했을 뿐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했던 걸”.

홀로 여름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갈 이들이 『여름』과 함께 부디 너무 쓸쓸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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