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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LASSIC -<삼국사기> 제대로 보기
김부식의 <삼국사기>
[137호] 2006년 11월 06일 (월) 김병곤 본교 사학과 강사

현전하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자 정사(正史)인 좬삼국사기좭. 그러나 좬삼국사기좭는 정통사학자는 물론 재야사학자들에게도 긍정적이기 보다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과연 어떠한 평가가 좬삼국사기좭에 적당한 것인지, 기초적 이해를 도모해 그 실상을 판단해보자.

좬삼국사기좭는 고려 제17대 인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金富軾)이 13명의 사관들과 함께 1145년 편찬한 기전체사서이다. 왕의 전기(傳記)와 국가적 중대사를 왕의 재위 연월에 따라 기술한 본기(本紀) 28권〈신라본기(12권)·고구려본기(10권)·백제본기(6권)〉 삼국의 연표 3권, 제례·지리·관직을 정리한 지(志) 9권, 신하의 전기인 열전 10권 등 총 50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중 10권의 열전에 총 52명의 인물이 소개되었는데, 신라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그 중 김유신전이 상·중·하 3권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백제의 계백·견훤 고구려의 온달온달·연개소문·궁예전이 있기도 하지만 승려를 소개한 전은 없다.

좬삼국사기좭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편찬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편찬자 김부식(1076~1151)은 문열(文烈)이라는 그의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고문체의 대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으로 고려 중기의 유학자·정치가·역사가로써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 바로 김부식이다. 당시 고려 사회는 문벌귀족제의 폐해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정계에 진출한 김부식은 인종의 외척으로 실권을 장악한 문벌귀족 이자겸을 비판하는 등 왕도정치에 대한 공명심을 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자겸의 죽은 후 경주출신의 대표적 개경파 귀족으로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더욱이 1135년 묘청(妙淸)이 서경천도를 주장하며 난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삼군원수(三軍元帥)로 출정하여 ‘난’을 진압하고, ‘수충정난정국공신’으로 책봉되며 문무를 겸비한 실세가 된다. 그 후 김부식은 1142년 정계를 은퇴하고 인종의 배려로 좬삼국사기좭의 편찬을 맡게 된다. 그는 결국 사후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김부식이 지닌 유교주의 정치이념과 당시대의 혼란상은 그가 좬삼국사기좭를 집필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좬삼국사기좭를 통해 드러난 그의 서술 태도는 기본적으로 유교적 윤리관에 입각해 있다. 고구려 시조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석탈해·김알지 등의 탄생담을 서술하며, 신이사적(神異史蹟) 및 황당기궤(荒唐奇詭)를 산삭하여 소위 ‘동양적인 유교주의적 합리주의’를 표출하고 있음이 그 예이다. 이에 좬삼국사기좭는 재야사학자들로부터 중국에 대한 모화주의적 사대주의에 입각한 사서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특히 1980년대 중국을 제후국으로 삼았다는 치우천왕이나 환국-배달국의 이야기를 담은 좬환단고기좭가 우리나라 상고시대 사서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이후, 좬삼국사기좭의 대중적 비판은 상한가를, 인기는 하한가를 쳤다.

한국사가 근대적 역사학 방법론에 입각하여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약 1세기 전, 소위 일본의 어용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런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좬삼국사기좭의 초기기록의 기년이나 내용이 허무맹랑하다는 불신론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고구려는 졸본에서, 백제는 한강 하류에서, 신라는 경주 분지에서 시작된 소국이었는데, 삼국 모두 건국 직후부터 국경선을 맞대고 치열하게 군사적 쟁패를 다투는 모습 등은 불신론을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좬삼국사기좭의 건국기년을 보면 신라 B.C.57년, 고구려 B.C.37년, 백제 B.C.18년으로 신라가 가장 빠르다. 반면 본기를 보면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율령 반포·불교 수용 등의 사회 발전 속도는 신라가 약 200여년 늦은 후진국일 뿐이다. 고고학적으로도 기원전부터 A.D.5세기대까지 고구려와 백제가 수위를 다투었고, 신라가 가장 낙후되었다. 대체로 김부식이 신라 혈통을 지녔으므로 신라 제일주의적 입장에서 삼국의 건국연대를 조작하고, 좥신라본기좦가 12권으로 가장 많은 권수를 차지하며, 열전에도 신라 인물이 다수라는 것 등에서 좬삼국사기좭의 편협성이 지적되어 왔다. 그 결과 좬삼국사기좭는 고구려의 후예국을 표방한 고려 초기의 강건함이 사라지고, 문신 중심의 귀족사회와 유교주의의 팽배 속에 보수적인 신라 중심의 역사서가 되었다.

그러나 김부식에게 당시 사회상과 상관없는 초시대적 인물이기를 기대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안팎으로 비난받고 있는 김부식을 위한 변명이 필요한 것이다. 우선, 삼국의 건국 연대는 통일신라 사가들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김부식도 여기에 속아 넘어갔을 여지가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좬삼국사기좭를 보면 신라인들은 고조선의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이 신라를 건국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에 신라인은 고조선 멸망 이후 최초의 갑자년[革命의 歲]인 B.C.57년을 건국 기년으로 설정하고, 여기서 고구려는 20년을 감하고,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백제는 19년을 더 감해 각국의 건국 시년을 조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본기도 신라 천년사(B.C.57~935), 고구려 700년사(B.C.37~668), 백제 680년사(B.C.18~660)를 감안하면, 신라(12권)·고구려(10권)·백제(6권)의 상대적 비중도 균등한 편이다. 여기에 열전의 편협함도 언급될 필요가 있다. 좬삼국사기좭의 인용서를 보면 좥신라고기좦, 좥화랑세기좦, 좥한산기좦 등 신라 자료가 대부분으로 기초 사료부터 신라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좬삼국사기좭에서는 삼국을 균등하게 좥본기좦로 취급했을 뿐만 아니라 삼국의 대외 관계에 있어서 1인칭인 아국(我國)·아병(我兵)등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이한 건국 신화의 기본형은 기록하였고, 거서간 등의 신라 고유 왕호 소개, 중국식 유년칭원법(踰年稱元法)을 인정하였지만, 고유의 즉위년칭원법을 유지한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는 곧 중국적인 정통론 내지 명분론에서 제법 자유로움과 냉정한 객관성을 유지한 결과이다. 결론적으로, 유교주의적 사대주의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14세기 이후 조선왕조의 사가들에 비해 융통성과 현실성이 더 많이 반영되어 있는 텍스트가 바로 이 좬삼국사기좭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일연이 편찬한 좬삼국유사좭와 달리 좬삼국사기좭가 서명 그대로 신라·고구려·백제 삼국의 역사만을 오로지 다룬 것과 동시에 발해·가야 자국사로 처리하지 않은 점은 지금이나 앞으로나 계속 아쉬운 대목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사를 그들의 역사로 주장하는 오늘날, 우리는 독립적인 좥고구려본기좦가 입전된 좬삼국사기좭만을 내미는 것만으로도 중국 사가들의 의도적 역사 왜곡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김병곤 (본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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