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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박인원 옮김, 문학동네, 2011
몰락하는 자로서의 예술가
[168호] 2011년 10월 31일 (월) 라유경 소설가

         
 
끊임없이 중얼대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말을 멈추거나 호흡을 가다듬지 않는다. 숨이 가득 차, 물을 마실 법도 한데 말하는 이는 화장실에 다녀올 시간도 주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사람. 그러나 그의 중얼거림에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된다. 바짝 붙어 앉아 쉼 없이 듣고 싶어진다. 말을 자세히 들어보니 들을수록 몰입된다. 그가 말하는 ‘몰락하는 자’가 어떤 인물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난 생각했다.’의 연속으로 이 소설을 이끌어간다. 화자가 생각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닌, 친구 베르트하이머다. 음악학교에서 호로비츠로부터 함께 수업을 들은 ‘나’는 베르트하이머를 한눈에 알아보고 말을 건다. 이 둘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다른 학생들보다 월등하다. 하지만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은 이후 그들의 길은 달라진다. 베르트하이머는 ‘보여줄 건 없고 잃을 것밖에 없는’ 몰락하는 자로. ‘나’는 몰락하는 자의 몰락하는 과정을 얘기해주는 철학자로.

글렌 굴드는 대충하는 건 경멸하는 완벽주의 예술가다. 그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그러나 독자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글렌 굴드보다, 글렌 굴드로 인해 서서히 몰락해 결국 자살을 선택한 베르트하이머에게 매력을 느낀다. 몰락하는 자는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예술에 무지한 부모님에 대한 증오심. 여동생의 배신에 대한 복수심. 글렌 굴드를 따라갈 수 없다는 인정에서 나온 자기경멸을 느낀다. 그는 글렌 굴드처럼 될 수 없음에 절망하고 피아노를 포기한 후 정신과학자가 된다.

베르트하이머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다보면 글렌 굴드와는 다른 예술적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완벽함으로 나아가고자 열망하는 것도 예술가의 정신이지만, 완벽할 수 없다면 그의 반대편으로 끊임없이 추락하고자 하는 의지를 행하는 것 또한 진정한 예술가의 모습이라고 느껴진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경멸할 줄 모르는, 경멸스럽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자기 자신을 경멸할 줄 ‘아는’, 몰락하는 자는 외친다. ‘우리가 비참함과 비열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야. 음악에 재능이 없어서야! 사는 데 소질이 없어서라구!’ 음악과 사는 게 일치했던 베르트하이머. 그가 이렇게 무너지며 몰락할 수 있었던 힘은 예술을 완벽하게 구현하고자 했던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한 작가다. 본국에 대한 증오심을 지닌 그는, 분노를 자신의 작품에서 언어 실험으로 표출한다. 사건의 흐름보다는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소설을 쓰며 스스로를 ‘전형적인 이야기 파괴자’로 지칭한다. 그의 언어는 매혹적이다. 소제목이나 단락구분도 없이 빽빽이 가득 찬 글자들은 단순히 수다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예술에 대한 집착과 질투, 분노 등의 표출이 우리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 글을 쓰는 자세를 돌아보게 만든다.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는 베르트하이머의 말은 독자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그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으로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몰락하는 자』는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의 거친 말투로 서술되지만, 중독성 있는 그의 글을 읽다보면 마치 음악을 듣는 듯한 리듬을 느끼게 된다.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는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이것은 허구인가 진실인가? 픽션인가, 평전인가? 그의 독특한 문체는 그 둘 사이를 줄타기하는 듯한 긴장감에 빨려들게 만든다. 글렌 굴드를 만난 뒤 몰락해가는 베르트하이머를 이야기하는 ‘나’의 생각과 말들. 생각의 끝은 깨달음으로 결론지어지지 않는다. 그의 모습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베르트하이머는 ‘끔찍할 정도로 조율이 안 된 피아노’를 주문한다. ‘아무 가치도 없는 피아노’가 도착하자 바로 앞에 앉아 미친 것처럼 연주를 시작하는 ‘몰락하는 자’. 그 장면은 완벽한 예술성의 추구와 실패에서 오는 자괴감, 자기연민, 애정의 집착으로 인해 인생의 조율이 흐트러져 자기 자신을 몰락시킨 예술가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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