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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가면을 쓰고 이야기하는 듀나
SF 불모지에서 SF를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
[167호] 2011년 09월 26일 (월) 이갑수 소설가

<이 작가를 말하다>의 기획의도 중 하나가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를 소개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이름이 바로 듀나였다. 너무 1차적인 해석인지도 모르지만, 듀나야 말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기 때문이다. 우선 누구도 듀나를 본적이 없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단편이나 SF관련 선집에서 사용하는 이름인 이영수가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알 수 없다. 오직 메일로만 청탁서와 소설을 주고받으며, 인터뷰도 메신저로 한다. 그래서 듀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소문이 많다. 40대 여성이라는 일반적인 이야기부터, 중견 소설가 P가 듀나로 활동한다는 이야기,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듀나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게 맞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듀나의 글뿐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혹은 그녀

듀나는 1994년부터 컴퓨터 통신을 통해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6년 『이매진』에 단편을 연재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은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주면서도 한국 사회와 문화를 담아내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소설 외에도 영화평론, 문화비평 등 여러 분야에서 글을 쓰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 SF소설에 대해 말할 때 듀나는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름이다. 17년간 꾸준히 다양한 매체에 작품을 발표에 왔고, 공저를 포함하면 10여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다. 그러나 장르 소설을 한 수 아래로 보는 완고한 시각 때문에 좀처럼 평단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고,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문학의 경계, 그 경계의 이름 듀나

앞서 듀나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국의 53만 수험생이 듀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교복을 입은 아이를 아무나 붙잡고 듀나를 아느냐고 질문하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ebsi.
컴퓨터 자판의 한/영 변환키를 잘 못 누른 상태에서 ebsi를 치면 듀나 라는 글자가 완성된다(못 믿겠다면 컴퓨터를 켜고 검색창에 써 보면 알 것이다). 전국의 수험생이 알고 있으므로, 그리고 한때 수험생이 아니었던 어른은 없으므로, 듀나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다.
SF는 종종 미래를 예견한다. 핵잠수함도, 인간이 달에 가는 상상도, 화성탐사도, 클론도 모두 현실이 되었다. 물론 듀나가 ebsi가 생길 것을 예상하고 이름은 지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어쩌면 듀나라는 이름은 문학의 한 경계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변환키를 누르면 교육방송의 인터넷 서비스가 SF작가로 변한다.
한국은 SF의 불모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SF를 공상과학소설이라고 번역하면서 SF는 어린아이들이나 읽는 것이라는 오해가 생겼다. 그리고 본격문학/대중문학의 엄격한 구분 속에서 장르문학을 한다는 것 자체로 평가절하되는 경우도 많았다.

   
 
  △ 장르문학의 불모지에서 핀 SF의 꽃  
 


SF로 인간, 세계에 대해 이야기

듀나는 17년간이나 꾸준한 활동을 했고 작품의 완성도도 인정받아왔다. 그러나 어떤 문학상의 후보에도 듀나의 이름이 올라간 적은 없다. 문학 전공자들 중에도 듀나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것은 잘못된 인식 때문이다.
SF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단순히 외계인과 로봇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사고 실험의 문학은 모두 SF라고 부를 수 있다.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과학과 과학적 사고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듀나는 장르문학을 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 중 하나로 장르적인 요소를 사용할 뿐이다.

언제나 전선의 최전방에서 싸우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계속해서 죽이는 딸들이 있다 (「너네 아빠 어딨니?」). 모종삽으로 좀비가 된 아버지를 파묻는 소녀들을 보면서 나는 듀나라는 작가의 모습을 연상했다. 문학은, 아니 어쩌면 예술은 기시감, 전형성과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듀나는 늘 그 전선의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다.
장르문학은 고유의 문법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듀나가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기존의 문학을 비틀고 뒤집는 작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우리는 선배들의 어깨 위에서 도약하고 있다. 듀나는 자신의 작품들이 해리 해리슨, 에히리 케스트너, 아이작 아시모프, H.P 러브크래프트, 제임스 매서슨 등 많은 선배들의 작품들에서 영향받았음을 작가의 말에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듀나는 기존의 것을 차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비틀고 뒤집는다. 가령 이런 식이다.
기계 문명이 인류를 지배한다 (「기생」). 그런데 기계문명에 대항하여 싸우는 「터미네이터」식의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기생 동물처럼 기계 밑에서 안존하며 새로운 존재 의미를 찾고자 한다. 또는, 외계의 바이러스가 지구에 떨어진다(「죽음과 세금」). 그 결과는 어떨까? 인류가 이상한 병에 걸려서 죽어가고, 그것을 막으려는 주인공이 등장할까? 듀나의 소설에서 외계의 바이러스는 전 인류를 영생하는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정부는 노인문제와 주택문제, 실업문제를 이유로 나노 로봇으로 시민들을 몰래 죽인다.
새로움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곧 전염되며, 또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 잡는다. 우습게도 듀나가 클리쉐 파괴를 위해 수행한 것들을 모방하는 습작생들이 생겨나고 있다. 듀나 자신이 또 하나의 클리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듀나는 안주하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전형성과 혈투를 벌인다.

전형성과의 혈투를 벌이는 듀나

영양가는 부족한데도 생각보다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어떤 식으로 끝내는 게 좋을까? 어떤 것이어도 좋다. 듀나의 말처럼 결국은 어디에서 이야기를 자르느냐의 문제니까. 문장을 차용해서 비트는 게 좋을 것 같다.
당신이 만약 편의점에 간다면 주위를 잘 살펴라. 당신 옆의 한 여자가 물을 살 때, 당신 뒤의 남자가 면도날을 살 때, 당신 앞의 노인이 휴지를 살 때, 그 사람이 듀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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