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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페리온
댄 시먼스,『히페리온』, 최용준 옮김, 열린책들, 2009
[165호] 2011년 05월 02일 (월) 홍덕구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일곱 순례자가 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황량하고 위험한 행성. 전 우주의 패권을 쥔 헤게모니 연방조차도 포기해버린 별. 죽음의 사자가 광야와 골짜기를 배회하는 곳. 행성 히페리온이다.

일곱 순례자에겐 일곱 개의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일곱은 곧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이 공통으로 직면한 문제는, 형태는 다를지언정 ‘시간’이다. 히페리온을 향한 고통스러운 순례의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아니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공유한다. 가느다란 일곱 개의 이야기가 얽혀서 만들어질지도 모르는 하나의 줄기만이 벼랑 끝에 매달린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다. 어쩌면 그들은 히페리온에 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기 위해 히페리온으로 나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사는 오직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만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구는 수명을 다했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종은 이미 지구의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였다. 지구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인간은 ‘파캐스트’ 라는 워프 기술을 통해 우주 곳곳에 퍼져 있는 행성과 위성들로 구성된 ‘월드 웹’을 조직했다. 월드 웹은 빛의 속도를 훨씬 뛰어넘은 초광속으로 인간을 워프 시킬 수 있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우주적 규모의 19세기가 펼쳐진다. 웹은 곧 권력이 되고, 아직 웹에 가입되지 않은 행성들에 대한 쟁탈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각 행성의 고유한 자연과 문화들은 말살되고 ‘보편적인’ 월드 웹의 표준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웹의 무한한 가능성과 확장성에 환호했지만, 극소수의 인간들은 사멸해 가는 것들에 애도를 표하고 있었다.

두려움은 몰이해로부터 온다. 아직 웹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행성 히페리온에서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지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히페리온의 원시 부족사회에서 발견된 ‘십자가’ 표식. 쇠락한 카톨릭은 그 십자가의 발견을 교세 부흥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현지조사를 맡은 신부가 마주친 진실은 신의 섭리라고 하기엔 너무도 잔혹한 것이었다. 빛보다 빠르게, 어쩌면 시간보다도 더 빠르게 이동하게 된 웹의 인간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약간씩이지만 시간을 흘린다. 흘려진 시간은 조금씩 쌓여서 마침내 작은 봉분을 이룬다. 그리고 그 시간의 무덤에서 고통의 신, 슈라이크가 태어난다. 시간을 초월해서 움직이며, 인간을 끌어안아 품 안의 가시로 찔러 죽이는 괴물. 슈라이크는 인간이 잃어버린 시간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일곱 순례자들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슈라이크와 관계된다. 바꿔 말하면 슈라이크와의 조우가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이다. 외교관, 학자와 그의 딸, 신부, 사립탐정, 퇴역 장교, 시인. 대표성을 지닌 멤버라기보다는 무작위로 추출된 듯한 인상이 더 강하다. 그들의 이야기도 왜 슈라이크가 그들을 선택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저 우연히, 예기치 않게 친구와 마주치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인간이 잃어버린 시간과 마주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포옹은 연기되었다. 가장 소중한 것들을 저당 잡힌 대가로. 외교관은 과거를 담보 삼았고 신부는 생명을 맡겼으며 학자는 딸의 미래를 빚졌다. 사립탐정은 연인을 잃었고 퇴역 장교는 연인과의 추억을 잃었으며 시인은 아직 쓰지 못한 시를 내기로 걸었다. 이 순례가 끝나면 그들은 저당 잡힌 것들을 되찾아서 행복하게 귀환할 수 있을까? 실은 그들 자신조차 그렇게 믿고 있지 않은 듯하다. 모여진 이야기들은 배후에 있는 거대한 음모를 암시한다. 목적을 위해 시간의 무덤조차 이용하려고 하는, 결코 시간을 흘리지 않는 또 다른 자들.

그리고 여기 여덟 번째의 순례자가 있다. 우리가 히페리온을 향한 그들의 순례에 동참하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는 아주 저렴한 편이다. 약간의 돈과 시간, 편안한 의자 하나면 충분하니까. 18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의 장시 『히페리온』을 미리 읽어둔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일단 책을 펼쳐든 독자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슈라이크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당신을 포옹할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정신없이 흘러가는 현대의 시간 속에서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그 누가 안심할 수 있겠는가. (속편인 『히페리온의 몰락』 한국어판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 역자인 최용준씨가 번역을 완료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는데, 빠른 시일 내에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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