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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문학의 성과와 의의
[164호] 2011년 03월 28일 (월) 장영우 문예창작학과 교수

 

   
 ▲ 故 박완서 작가
   
박완서는 한국 문학 특유의 장벽과 한계를 통쾌하게 극복하고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한국문학사의 외연과 내포를 확장한 작가이다. 박완서의 문학적 이력은 시작부터 끝까지 한국문학의 관습을 철저히 배반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작가와 달리 신춘문예나 문예지를 통한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여류작가라면 절필을 생각할 나이에 소설을 쓰겠다고 작품을 들이민 당찬 기질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올해 초 영면할 때까지 누구보다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면서 주요한 문학상을 모두 수상하는 등 한국의 대표적 소설가로 인정받았다.

박완서의 공식적 등단은 1970년 『여성동아』 장편공모의 『나목』을 통해서인데, 당시 그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고 매체 또한 본격문학하고는 거리가 먼 대중적 취향의 잡지여서 문단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우리나라 문단처럼 ‘본격문학/대중문학’의 구분이 엄격한 데다 등단 나이를 따지는 곳도 흔치 않을 터인데, 박완서는 등단 매체의 특이성 때문에 간과된 경우다. 요컨대, 1970년대 박완서 소설은 남다른 나이와 등단 배경, 그리고 여성이라는 조건 때문에 부당하고 악의적인 평가를 받는 조건이 되었다.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나목󰡕은 심사 당시에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고 심사위원 가운데 한 사람은 “앞으로 계속 쓸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강신재)고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70년대 박완서 소설에 대해 일부 비평가는 인신공격이라 할 정도로 가혹한 언사를 퍼붓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며 섬짓하게 느낀 것의 하나는 그가 무서운 집념을 가지고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는 이기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것”(홍정선)이라거나, “중산층의 양식이 드러내는 허세와 허위를 풍자하는 데에 이르면 그 애정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오직 풍자와 비판의 칼날만이 거의 살기를 띠고 번뜩인다”(성민엽)라는 감정이입적 언술이 대표적 사례다. 이것은 박완서 소설이 한국 중산층 남성의 위선과 이기심, 세속적 욕망을 적나라하게 해부하여 드러낸 것에 대한 남성 비평가들의 불편한 자의식의 토로였다고밖에 달리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재의 성가(聲價)만으로 그녀의 문학적 도정이 순탄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녀는 우리 문단의 고질적 순혈주의와 남성주의에 의연히 맞선 의지의 작가이며,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웅숭깊은’ 작품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능란한 이야기꾼이다.

1970년부터 2010년까지 40년 동안 박완서는 꾸준한 행보와 일정한 수준의 작품을 써온 거의 유일한 여성작가다. 박완서는 서른여덟의 나이에 󰡔역사는 흐른다󰡕로 등단한 한무숙의 천재와 한국문학의 거편 󰡔토지󰡕를 완성한 박경리의 저력을 두루 갖추고 있다. 한무숙은 소설과 희곡으로 모두 네 번이나 현상공모에 당선된 희귀한 이력을 지닌 작가이고, 박경리는 삼십여 년에 걸쳐 한국근대사의 명암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하여 여성작가의 한계를 불식시킨 뚝심의 작가이다. 박완서는 이들 선배 작가의 장점을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등단 이후 오직 글쓰기에만 진력함으로써 평생 현역작가로서의 한 전범을 보여주었다.

우리 문단에서 천명을 다할 때까지 꾸준히 글을 쓴 문인은 서정주와 김춘수, 그리고 이청준과 이문구 등 극히 소수의 남성에 지나지 않는다. 70년대 작가로 지금까지 글을 쓰는 이는 최인호, 이문열 뿐이고, 오정희는 「새」 이후 거의 신작 발표를 하지 않고 있다. 박완서는 반평생 초발심을 가지고 꾸준히 글을 씀으로써 후배 (여성)작가들의 한 나침(羅針)이 된 것이다. 박완서 소설은 이전의 여성소설이 보여주었던 여성 주인공의 사소하고 개인적인 감정과 관념의 갈등이나 유희에서 벗어나 개인과 사회의 부조리와 몰염치를 신랄하게 꾸짖음으로써 작품의 사회성, 역사성을 획득하고 있다.

   

   ▲ 추모 기획전 포스터

   
박완서 소설은 산업화 시대 중산층의 이기주의와 물질적 욕망을 다루던 초기 경향에서 점차 6.25와 관련된 참혹한 개인사의 증언, 거기서 더 나아가 페미니즘과 노인 문제로 제재와 주제가 확장되고 심화된다. 박완서 소설의 주인공은 개인의 내면 깊숙이 감춰진 위선과 이기심을 가차 없이 폭로하는 데 누구보다 탁월한 기량과 어휘력을 구비하고 있다. 박완서 소설의 화자나 작중인물의 비판과 야유에서 일부 비평가가 ‘살기’를 느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들의 발화는 독자의 무의식 속에 갇혀져 있던 공격적 본능과 보복의 감정을 일깨운다. 그러나 70〜80년대 박완서 소설의 주류를 형성했던 복수의 글쓰기는 노인들의 세계를 다룬 작품에서 따뜻하고 푸근한 사랑과 포용의 태도로 전환된다. 그것은 전쟁으로 오빠와 삼촌을 잃고, 환갑도 안 된 나이에 남편과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도저한 상실감과 절망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도달한 정신의 성취여서 더욱 값지다. 그녀의 소설은 기존의 여성소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교정하는 한편, 노년문학의 바람직한 한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박완서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장점 가운데 하나는 재미있게 읽힌다는 점이다. 그 재미의 원천은 박완서 특유의 직설적이고 정곡을 찌르는 비유와 단순명쾌한 어휘 선택에 있다. 박완서 소설의 작중인물은 세속의 관습이나 예의에 얽매여 자신의 감정을 속이거나 치장하는 다른 여성작가의 인물과 전혀 성격이 다르다. 그들은 일상어와 비속어를 능란하게 구사하는데, 여성의 조신함을 포기한 날것 그대로의 화법은 수족관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등푸른 생선처럼 싱싱하고 힘이 넘친다. 또한 박완서 소설은 구성이 다소 산만하고 허술한 듯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것이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된 서사전략에 의한 허술함인지 깨닫게 된다. 이런 점에서 박완서 소설의 문체는 여성의 ‘수다’를 일상적 담화 수준에서 서사적 담론의 차원으로 격상시켜 놓은 비범한 보기라 할 수 있다.

박완서는 소설의 원류가 이야기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작가다. 그녀가 소설에서 다루는 제재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흔히 마주치는 사소하고 비속한 것들이고, 그 전달 방식 또한 수다스럽고 넉살좋은 여인들의 입담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융화되어 생성해내는 효과는 정통적 서사 담론의 경직성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자유롭고 활기차며 개방적이다. 그녀 소설의 화자는 관념적이고 개념화된 언어로 독자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일상의 속어와 육담까지도 적절하게 활용하는 한편, 사회와 개인의 치부를 드러내놓고 꾸짖고 야단침으로써 독자를 부끄럽게 하거나 십 년 묵은 울화를 풀어준다. 많은 독자가 그녀의 소설을 읽으며 공감하고 분노하며 모멸감을 느끼는 것은 전적으로 그녀 특유의 이야기 방식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 방식은 서구적 노블을 통해 학습된 것이라기보다 우리 고유의 이야기를 소설 장르에 결합시켜 이룬 성과이다. 그를 가리켜 뛰어난 이야기꾼이라거나 천의무봉의 작가라고 말하는 것도 그의 소설의 구성이나 문체가 서구적이기보다 전통적인 것에 가깝고 억지로 꾸며낸 문장이나 관념어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언어를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된다. 그녀야말로 우리말을 가장 적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할 줄 아는 작가인 것이다.

박완서는 상식과 염치를 존중하고 지키며 산 작가다. 그녀가 소설에서 그토록 신랄하게 비난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개인과 사회의 부조리나 몰염치와 관련된 것들이다. 70년대 그녀는 아내(또는 주부)로서 남편(또는 가장)의 허세와 위선을 정직하게 묘사함으로써 남성의 속물적 이기주의를 폭로하였다. 그녀의 소설에서 부부, 모녀, 형제는 때로 예각적으로 대립하거나 적대적인 감정까지 드러내지만, 그것은 그들 내부에 숨겨진 물질적 욕망에 대한 비판이지 가족 구성원에 대한 증오는 아니다. 그의 문학은 애초에 복수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르나 궁극에 이르러서는 사랑으로 휘갑된다. 그녀가 사소한 일에 그토록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결국 평범한 사람의 범속한 일상을 사랑했고, 그것이 상식과 염치에 의해 이루어지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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