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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그 낯설음에 대하여
[163호] 2010년 11월 15일 (월) 홍석진 극작가

2006년 초. 서점가에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인 희곡 <이爾>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이다. 혹자는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필자를 비롯한 희곡계, 연극계 관계자들에게 이것은 그야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정확한 통계자료를 찾아볼 수는 없겠으나 희곡 작품이 이렇게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은 대한민국 건국이래, 아니 서양문학이 한반도에 들어온 이래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  영화『살인의 추억』의 원작『날 보러와요』


책깨나 읽는다 하는 사람 중에도 희곡을 즐겨 읽는 이는 드물다. 더구나 학업이나 연구, 세미나 등의 목적이 아닌 그저 독서의 즐거움을 위해 희곡을 읽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 것이다. 특히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고전 작품-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 베케트 등의 희곡 작품-을 제외한 현대의 창작 희곡을 즐겨 읽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좀 과장해서 얘기하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한 후 이집트 사막에서 자신이 통과한 바늘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까. 솔직히 필자 역시 극작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이전까지 제대로 희곡을 읽어 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 이러한 현실을 대변한다.


이렇게 희곡이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크게 보아 다음의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하나는 희곡이 문학과 연극, 모두에 속하고 있다는 특성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희곡은 상연을 전제로 한 문학 장르이다. 즉, 문학의 한 장르이긴 하지만 읽히기 보다는 공연을 통해 관객(독자)들과 접하는 것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또 연극의 입장에서 희곡은 곧 대본이 된다. 연출의 언어들-배우, 무대, 음악, 조명 등등-중 하나가 되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희곡은 문학과 연극 어느 곳에서도 확실히 자리매김하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변두리로 밀려 나게 되었다 하겠다.


두 번째는 희곡의 형식이 갖고 있는 낯설음이다. 문학의 3대 장르라 할 시, 소설, 희곡은 모두 활자로 되어있지만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시, 소설이 누구나 쉽게 써볼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그러나 쉽게 쓸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반면에 희곡은 뭔가 어려운 규칙이 있을 것만 같고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역시 간략한 지문과 대사만 주어질 뿐 서술이 거의 없는 희곡의 형식적 특성 때문이라 하겠다.
문학과 연극의 양다리를 걸칠 수밖에 없는 희곡의 성질은 바꿀 수도, 바뀌어서도 안 되는 희곡 고유의 특성이다. 그러나 희곡의 형식적인 낯설음은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친숙한 것으로 바뀔 여지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희곡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몇 가지 팁을 공개할까 한다.


일단 희곡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리 내어 읽는 것이다. 희곡의 대사는 구어(입말)로 되어 있다. 따라서 단순히 머리로 상상하여 읽는 것보다 직접 소리를 내어 읽어 보면 대사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겠지만 가급적 감정을 살려가면서 읽는다면 희곡을 읽는 재미와 함께 어쩌면 자신에게 숨겨져 있던 배우의 재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두 번째 팁은 무대를 상상하면서 읽는 것이다. 대개 희곡은 시작부에 무대에 대한 설명이 있게 마련이다. 매우 상세하게 소개된 무대 지문이 있는가 하면, 간략하게 공간만을 제시한 지문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당연히 상상의 무대를 그려보면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자신이 경험한 유사한 공간을 떠올리면 좋다.

△ 원작 『이』를 영화화 한 『왕의 남자』


세 번째 팁은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데, 한편의 공연을 보는 것처럼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두고 읽는 것이다. 실제 연극 공연은 약 1-2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점층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대개의 희곡은 그러한 흐름에 맞춰져 있고, 그 흐름을 따라갈 때 가장 작품에 몰입하기 좋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방법에 익숙해지면 희곡의 참된 재미는 물론이요, 마치 머릿속에서 가상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경험도 능히 가능하다. 이렇게 필자가 다소 뜬금없이 희곡을 읽는 법을 나열한 것은 희곡 책을 팔거나 홍보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단지 다양한 독서 경험을 강조하려다보니 자연스럽게 문학 장르에서 소외되기 쉬운 희곡을 예로 들게 된 것뿐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모든 책은 ‘양서’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당장은 해로워 보이는 책도 언젠가는 훌륭한 반면교사로써 우리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 것이다. 다만 우려하는 독서 습관이 있다면 바로 ‘편독’이다. 음식도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먹어서는 균형 있는 영양 섭취가 불가능한 것처럼 독서도 좋아하는 분야만을 읽는 것은 좋은 독서 방법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에 관심이 있다고 시, 소설만 읽고, 경제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주식, 재테크서적만 읽어서는 책이 선사하는 폭넓고 다양한 삶의 색깔과 무늬들을 경험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한출판협회에 따르면 서점가에는 하루에도 100여권, 연간 4만 여권의 책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출판된 책들의 7-80%는 별 주목도 받지 못하고 책장 구석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게 된다. 그리고 희곡 역시 그 대표적인 먼지구덩이 속 문학이다. 이제 시야를 넓혀보자. 지금껏 별 흥미를 갖지 못했던 책이 있다면, 혹은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책이 있다면 과감히 먼지 덮인 책장을 열어보시라. 어쩌면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인식을, 새로운 경험을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책이 희곡이라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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