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3.22 월 11:56
인기검색어 : 등록금 반환, 코로나19, 조교 문제
신문사소개 | 호수별 기사보기
> 뉴스 > 학술 서평 > 서평
     
희망의 저편 - 기억과 죽음 사이에서
프리모 레비,『휴전』,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0
[162호] 2010년 10월 04일 (월) 임세화 국문학과 석사수료

때로 희망은 인간 그 자신을 먼 미래의 지평까지 불투명하게 데려다 놓는다. 희망은 연약한 하나의 가설로 존재하며 덕분에 거의 모든 가설을 채택할 수도 있다. 2010년 대한민국에 희망은 강력하고 선명한 하나의 이미지로 제시되고 전망되어지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그것은 공익광고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나 굳건한 정치적 캐치프레이즈로 선동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혹의 치장을 한 채 장려된다. 모순적이고 불쾌한 과거, 기억은 적절하고 유용한 편집의 과정을 거쳐 재배치된다. 둥글게 다듬어지고 완성된 세계 속에서 자발적인 오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


어쨌든 지금은 그 자신을 속이며 날조된 위안을 부여하는 일이 불가능한 시대는 아니다. 그것은 다양하고 거대한 수사와 층위의 종합들로 구성되고 증식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19년 토리노에서 태어나 1987년 돌연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우슈비츠의 기적적인 생환자 중 한 명인 프리모 레비의 증언은 우리에게 다만 흥미롭고도 끔찍한 이국의 이야기, 옛날에 일어난 국지적이고 특수한 정치적 경험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 이은 두 번째 책의 제목을 『휴전』이라고 짓는다. ‘종전’이 아닌 ‘휴전’이다. 우리는 그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가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행 열차를 타고 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면 『휴전』은 독일군이 아우슈비츠 지역에서 철수하는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때까지 아우슈비츠에 살아 있었던 운 좋은 생존자들의 귀환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 있던 모든 생존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병으로, 추위로, 기아로 인해 구출되기도 전에 혹은 구출되고 난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1월부터 고향에 돌아간 10월까지의 기나긴 여정, 감옥처럼 단단히 봉쇄된 국경들과 수인번호처럼 주어진 자유의 모순, 굶주림과 불확실성의 전망 속에서 동유럽 전역을 유령처럼 헤맨 끝에 생환한 자의 증언이 바로 『휴전』이다. 처음 토리노에서 출발할 때의 인원 650명 중 단 3명만이 살아 돌아갔다. 그것은 다만 숫자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귀환했을 당시의 상황을 프리모 레비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집은 그대로 있었고 가족 모두 살아 있었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얼굴이 붓고 수염이 덥수룩하고 차림새가 남루해서 나를 알아보게 하기가 힘들었다. 아우슈비츠에서 나온 직후와 마찬가지로 누구도 그들의 생환을 대단히 놀랍거나 감동적인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을 축복해준 최초의 인간은 토리노의 욕쟁이 노인이었고, 그는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해 교황처럼 엄숙한 손짓으로 축복의 의식을 행한다. 앞서 출간된 『이것이 인간인가』와 『주기율표』를 읽은 독자라면 귀환이 완료되는 순간의 수많은 모순들, 기쁨이나 안도감, 허탈함이나 낯섦 등의 단어로 수렴되지 않는 비정상적인―모든 것이 다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 부각되는― 순간의 아이러니를 더 잘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귀환은 모든 고난과 역경의 이야기의 끝, 마지막이 주는 화합과 안정의 축제여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환자들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계속 살아나가야만 했다.
프리모 레비는 절망에 대해서도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의 기록 속에 희망이라는 단어는 한 시간 뒤에 먹을 수 있는 한 그릇의 죽 앞에 붙여진다. 그는 증오에 대해서도 연민에 대해서도 고통에 대해서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잔혹한 상황을 독일인들이 정말 알지 못했을까를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방조된 무지가 그들 자신으로 하여금 나치의 공범자가 아니라는 안식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방식의 희망이나 절망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우리에게 역설적인 의미에서 기묘한 희망의 감각을 보여준다. 그는 기억했고 그것을 기록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완전히 행복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완전히 불행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완전한 감각, 완전한 실체, 완전한 미래와 과거의 꿈. 그 자신조차 명확히 감각할 수 없는 불안과 위협의 느낌들을 프리모 레비는 귀향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겨놓는다. 공포로 가득한 꿈. 세부적으로는 다양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가지인, 또 다른 꿈속에 든 꿈.
나만 홀로, 온통 잿빛의, 무감한 무(無)의 한가운데에 있다. …… 그것은 내가 다시 라거(수용소) 안에 있고, 라거 밖에 있는 그 무엇도 진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 꿈속의 꿈은, 평화의 꿈은 끝이 난다. 차갑게 계속되는 바깥의 꿈속에서 나는 익히 알려진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아우슈비츠에서 들려오는 새벽의 명령 소리, 두려워하면서 기다리는 외국어 한마디, ‘브스타바치(기상)’.

ⓒ 동국대학원신문(http://www.dgugspres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페이스북 방문해 주세요!
더 많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육방송국 동국대학원신문 동대신문 동국포스트
동국대홈동국미디어컨텐츠 센터동대신문교육방송국동국포스트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4620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 1길 30 동국대학교 학술관 3층 대학원신문 | 전화 : 02-2260-8762 | 팩스 : 02-2260-8762
발행인 : 윤성이 | 편집인 : 변재덕 | 편집장 : 서신화 | 발행처 : 동국대학교 대학미디어센터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재덕
Copyright DGUGSPRES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gupress@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