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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사전이 아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키워드』, 김성기·유리 역, 민음사, 2010
[162호] 2010년 10월 04일 (월) 조형래 신흥대 초빙조교수

 

국내 인문학 관련 논문의 인용빈도에 관한 명확한 통계 내지는 순위가 존재한다면 아마도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Keywords :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는 그 상위에 랭크될 것이다. 그만큼 용어 및 개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관련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키워드』는 참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이었다. 특히 영미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전통에 직간접적으로 빚진 바 있는 이라면 『키워드』의 항목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키워드’들이 형성된 역사적 내력과 사정에 대한 조명 못지않게 이 책이 오늘날의 문화연구라는 분과학문에 미친 중대한 영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인문학의 여러 분과에서 활용되고 있는 중요한 개념과 용어들의 역사적 유래와 그 원의 및 변천, 그 형성과정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적 함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는 이 책이 빈번한 인용과 참조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텍스트라는 것은 구태여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 역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나 용어와 대결해야 할 때면 언제나 『키워드』의 원서 또는 일본어판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워드』(개정판)의 한국어판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 책의 의의에 대해서 다시금 이야기한다는 것은 도리어 구구하다. 그저 더 이상 외국어를 통한 우회를 거치지 않고, 키워드로 대변되는 용어 또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역사성을 규명하고자 했던 초창기 문화연구의 한 시도와 직접 대면하는 일이 가능해졌으며, 그것이 우리의 사유를 한층 정교하고도 풍성하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영국에서 초판이 1976년, 개정판이 1983년에 간행되었던 이 책이 지금 우리 곁에 도착한 것은 확실히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한국에서 윌리엄스에 대한 소개가 비교적 일찍 이루어졌다는 점, 90년대 이후 문화연구가 중요한 분과학문으로 부상하면서 다양한 영역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던 사실을 감안하면 더 그러하다. 물론 각 키워드의 설명을 위해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물론이고 여러 유럽어의 고어(古語) 및 다양한 용례가 동원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본에서 1980년에 초판이, 개정판이 2002년에 번역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키워드』의 번역이 지연된 것은 여전히 아쉽다. 물론 역자들이 후기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는 한국에서 윌리엄스 및 문화연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예전 같지 않게 된 사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우려하는 것은 이러한 지연이 개념적 용어의 번역이나 창안, 그리고 그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성찰에 유난히 인색했던 과거의 어떤 지적 풍토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번역에 관한 언론과 대중의 무관심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키워드』의 번역이 최근 불충분하게나마 다양한 용어 사전이 번역 또는 출간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작업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관심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키워드』의 한국어판을 두고 인문학 연구를 위한 유용한 사전 하나가 번역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될 터이다. 도리어 (『문화와 사회』의 문제의식의 연상선상에서 『키워드』를 통해) ‘대중(mass)’ 같은 용어의 정착 과정을 실상 그러한 개념들을 둘러싸고 벌어진 계급 간 헤게모니적 기투로서 탈구축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궁극적으로 그 역동적인 투쟁의 영역으로서의 ‘문화(culture)’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윌리엄스의 문제제기로 회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키워드』의 번역은 일련의 용어 사전류의 편찬과 번역 또는 집대성 작업이 활발해진 최근 한국의 사정과 관련하여, 부지불식간 학문적·개념적 용어를 자기 것으로 전유하고자 하는 모종의 이데올로기적 상충과 기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시사하는 사건은 아닐까.


최근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한국에서 통용되고 있는 학문적 용어의 번역과 창안과 관련된 역사적 과정을 규명하고, 그에 기초하여 현재 난립하고 있는 용어 사용의 통일을 도모하는 일련의 시도가 활성화되고 있는 사실은 그것을 단적으로 예증한다. 물론 그러한 종류의 작업은 학문 연구 및 교육, 그리고 소통을 위한 원칙과 기초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마땅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키워드』의 키워드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아카데믹한 작업조차 결코 불편부당하거나 ‘사심 없는 것’일 수 없으며 오히려 거기에 이데올로기라는 과잉(excess)이 항상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재차 환기시킨다. 이 점에서 『키워드』가 오랜 지연 끝에 도착한 사실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그것은 아카데미의 언어나 개념을 정리하려는 욕망에 기초한 최근의 시도가 내포한 역사성에 관한 우리의 근본적인 성찰을 단적으로 촉구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키워드』는 단순한 사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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