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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리터 :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
빌 헤이스,『5리터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 박중서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8
[161호] 2010년 05월 17일 (월) 김태훈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두 시체의 머리를 곧바로 절단하고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모조리 받아냈다. 머리는 물론이고 몸에서도 피가 웬만큼 쏟아져 나왔다 싶으면 이번에는 시체를 눌러서 더 짜냈다.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으면 이번에는 시체를 더 작은 조각으로 토막 냈고 나중에는 거의 다진 고기 수준으로 만들어서 피를 걸러내고 빨아내고 짜냈다. 그 과정에서 물이 추가될 경우에는 그 양을 일일이 기록했다.”(262쪽)

이 섬뜩한 장면은 의학사가 구스타브 엑스타인(Gustav Eckstein)의 저서 ‘머리달린 시체(The Body Has a Head, 1970)’에 실린 내용을 작가 빌 헤이스가 묘사한 것이다.

19세기에 진행된 2인 동시 해부는 인류가 “인간의 몸속에는 얼마나 많은 피가 들어 있을까”라는 질문의 해답을 얻기 위해 행한 가장 정확한 실험이었다고 작가는 책에서 밝히고 있다.

참수형에 처해진 두 범죄자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 5리터에서 이 책의 제목은 연원한다. 오래된 과거의 역사 속에 숨겨진 비인간적인 행보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신뢰하는 과학적 진실들 뒤에 가려진 과학자들의 노고를 여실히 드러낸다.

‘5리터’는 논픽션의 틀 안에서 자연과학적, 인문학적, 자전적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가령 HIV(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인 애인 스티브가 찬장 위에 올려져 있던 다리미가 떨어지면서 뾰족한 부분이 머리를 찧었던 사건은 불치의 질병 앞에 선 연인관계가 가지는 한계점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정액과는 다른, 생명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피의 분출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받았던 메두사의 피가 가지는 이면성―몸통 왼쪽에서 뽑아낸 피는 산 사람을 죽이는 힘이, 몸통 오른쪽에서 뽑아낸 피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힘이 있다―으로 이어지면서 스티브가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피의 역할과 그 핏속에 숨어있는 미세한 바이러스들의 위협적인 면모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낸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페르세우스가 고르곤 메두사의 목을 단칼에 베었을 때 흘러나온 피에서 천마 페가수스가 태어났다고 전한다. 사악한 거인 싸움꾼 크리사오르(Chrysaor) 역시 메두사의 피가 고인 자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작가가 자신의 상상으로 그려낸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자루 안에 집어넣고는 발밑에 생긴 피 웅덩이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본다. 그 모습을 저자는 “불가능한 일을 해내고 살아남은 자의 얼굴”이라고 일컫는다.

두려움과 회의를 이겨내려는 분투는 그 끝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끔 만든다. 전심을 다해 밀어붙인 결과를 스스로 응시하려는 욕망은 행위의 끄트머리에서 더욱 강렬해진다. 지친 몸을 달래며 자신의 성취를 바라보노라면, 그 성취 혹은 위업은 과거로 치환되면서 스스로가 저질러 왔던 행위의 이면까지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저자는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겪어야 했던 혼란과 누이의 생리에 대한 기억, 현대의 페스트라 일컬어지던 에이즈가 창궐하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지금의 애인을 만나 함께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 회고의 과정 안에서 저자는 피에 대해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터부와 무지가 과학적으로 규명되는 역사적 순간과 피와 관련된 질병들과의 투쟁의 기록, 피에 대한 다양한 문화사적 지식들을 놓치지 않고 서술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HIV의 발견자인 제이 레비(Jay Levy)의 계속되는 연구 여정에서 ‘오디세이아’의 한 대목을 떠올린다. 오디세우스와 그의 부하들이 고향 이타카로 갈 길을 잃고 지옥으로 찾아가 죽고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Teiresias)에게 조언을 구하는데, 오디세우스의 피를 마신 테이레시아스는 이타카로 돌아가는 안전한 길을 일러주는 동시에 오디세우스의 앞날에 대해 덧붙인다. “그리고 그대 자신에게는 더없이 부드러운 죽음이/바다 밖으로부터 와서, 안락한 노령에 제압된 그대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은 저자와 스티브가 그들의 삶을 꾸려나갈 작은 희망에 대해 암시한다.

동성애자, HIV 보균자로서 그들이 받아왔던 차별과 아픔은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이분법 아래에서 보잘 것 없는 의식에 지나지 않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함양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선입관과 인간으로서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깨우치게 해주는 고백으로서 이 책의 가치는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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