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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와우북페스티벌
세상을 읽는 가장 넓은 창
[136호] 2006년 10월 09일 (월) 권두현 편집위원 편집위원

가을이다. 가을을 한정하는 수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그 중에서 원우들에게 가장 와 닿는 수식어를 꼽아보라면 ‘독서의 계절’이 아닐까.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언제나 독서의 계절에 파묻혀 사는 원우들에게 ‘독서의 계절’만큼이나 낯선 어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역설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독서의 계절’은 있다. 서울 와우북페스티벌은 책과 홍대, 그리고 가을이 만난 실로 풍성한 축제였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서울 와우북페스티벌은 9월 22일부터 24일까지 “책 축제! 세계를 읽자” 라는 슬로건 아래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 300m를 주 무대로 카페, 클럽, 갤러리 등 30여개의 다양한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책은 항상 독자를 존중해주는 겸손한 매체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자의적으로 서사를 중단시킬 수 없다. 이에 반해 책은 언제나 능동적 서사 중단이 가능하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가 ‘빠름의 미학’으로 우리의 시각을 현혹한다면, 책은 ‘느림의 미학’으로 우리 앞에 그 수줍은 모습을 드러낸다.

때문에 비유하자면 책은 ‘거북이의 걸음걸이’다. 가히 속도의 시대라 할 만한 현대 사회에서, 느린 걸음으로 책이 제공하는 미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목적지에 최대한 빨리 도착하기 위해 가속 페달을 밟는 행위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일종의 본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속도와 만족감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속 300㎞의 고속전철과 시속 4㎞의 도보 이동은 보고 느끼고 배우는 깊이에서도 분명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즐긴다.

‘빠름의 미학’은 가상의 공간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근대를 탄생시킨 ‘책’은 그러나 광속의 인터넷이 제공하는 속도에 밀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인터넷 창이 조금이라도 늦게 뜨면 안달을 내는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상기하라. 유치원생부터 대학생, 직장인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빌 게이츠보다 훨씬 더 바쁘게 사는 게 근래의 우리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빌 게이츠보다 바쁘게, 그리고 ‘빨리’ 살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바쁜 빌 게이츠가 엄청난 독서광이라는 사실이다.

가상의 공간에서 빠져나와 실제의 공간으로 돌아와 보자. 그리고 올 가을엔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천천히 길을 한 번 걸어보자. 흙길로 남아있는 문경새재나 대관령 옛길처럼 역사적 사연이 서린 곳도 좋지만, 서울 시내 홍대 거리도 충분히 훌륭하다. 홍대 앞 걷고 싶은 거리야말로 그 자체가 ‘천천히 읽고 싶은’ 한 권의 훌륭한 책인 것이다.

문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문화의 중심에 언제나 책이 존재했던 것처럼, 서울 시내 중심 홍대 거리에서 북페스티벌이 열렸다. 책이 자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였듯이, 홍대 거리에서 열리는 축제는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곳의 왁자지껄함은 사람들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책들이 외치는 함성, 그것이 더욱 우렁차다. 30% 할인, 세 개 사시면 하나는 덤! 평소 근엄하던 책들이 이 날만큼은 경쟁적으로 몸값을 낮추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람들은 거기에 귀 기울이느라 오히려 목소리를 낮춘다.

우리가 가장 많이 책을 읽는 장소는 어디일까. 지하철이나 버스가 아닐까. 홍대 거리에 ‘책 읽는 버스’가 나섰다. 물론 요금은 없다. 편안히 읽을 수 있는 책 한 권이면 탑승이 허락된다. 안에 들어가 보자. 수많은 책들과 함께 푹신한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흐트러진 자세라도 상관없다. 책을 읽기 가장 좋은 자세이기만 하면 된다.

홍대 거리라는 한 권의 책 속에는 개구쟁이들이 뛰놀고 있는 풍경이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책이 거리로 나온 것처럼, 동화 속 주인공들도 책 밖으로 나와 꼬마 독자들을 만난다. 획일화를 강요하는 제도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홍대 거리에 나타난 도깨비와 만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비제도화된 풍경을 경험하게끔 한다. 아이들에게는 물론,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에게도 제4의 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제1, 2, 3의 벽도 없다. 다만 거기에는 책이 전하는 약속만이 부유할 뿐이다. 그 약속은 강요도, 충고도 아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누구라도 응하고 싶은 낭만과 동심에의 비밀스러운 초대이다.

다른 페이지에서는 좬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좭의 저자 한비야 씨가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책 속으로 행군해 들어가는 씩씩한 발걸음을 응원하기 위함이다. 그녀의 응원에 힘입은 수많은 독자들은 플래쉬 세례로 그녀를 환대한다. 웃음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그녀의 얼굴은 그 날 오후 홍대를 행군하고 있던 수많은 책들에게서 묻어나오는 즐거운 표정, 바로 그것이었다.

바람(wind)의 딸’로 한껏 주가를 올리던 그녀는 어느 날 긴급구호 팀장이라는 생소한 직함을 들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세계 일주 여행이나 계속하지,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느냐’는 물음들을 뒤로 한 채 5년을 보냈다. 그동안 그녀 특유의 따뜻함과 적극적인 삶의 태도는, 세상은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 벅찬 일인지 그녀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마지막 페이지가 가까워질 무렵, ‘기록의 창’ 부스에 놓인 책들이 작지만 당찬 목소리를 뱉어낸다. ‘차이를 차별하지 마세요’. 인종 차별, 성 차별에 항의하는 책들의 목소리는 날카롭지 않지만 묵직하다. 독자들은 차별이라는 폭력에 폭력적으로 맞서지 않는 그 온화함에 주목한다. 여기에는 오만도 편견도 없다. 그 대신 가볍지 않은 농담과 유머가 있다. 농담과 유머의 목소리는 귀가 아닌 마음에 공명한다. 천천히. 오랫동안. 그리고 영원히.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북페스티벌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25일에 출판인들의 인문학 위기 선언이 있었다. ‘한길사’ 김언호 사장, ‘돌베개’ 한철희 사장 등 67개 출판사 대표들이 25일 오전 종로구 사간동 대한출판문화협회 강당에서 인문 서적의 위기를 선언하고 정부와 관련기관에 인문서적 시장 회생을 위한 대책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던 것이다.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에 의해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묵시론적 예언까지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의 전언대로 확실히 위기는 위기다. 탄생이 있으면 소멸이 뒤따른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지만, 그 소멸이 ‘지금, 여기’에서 현재진행형으로 펼쳐진다는 것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축제가 끝난 직후 바로 제사를 지내는 심정이랄까. 북페스티벌을 가득 메웠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단 하룻밤 사이에 일제히 실종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책을 위한 축제가 필요할 정도로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어제의 힘찬 몸짓이 그저 무의미한 몸짓일 뿐이었나 하는 아쉬움과 함께 이제 막 말문을 트려 하던 수많은 책들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 같아 사뭇 섬뜩해진다. 물론 책에게 재갈을 물린 것은 책을 안 읽는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다.

책은 단순한 활자가 아니라, 세계를 보는 창이다. 우리가 갈 수 없는 ‘과거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 우리의 좁은 일상 세계를 뛰어넘는 모든 세계를 볼 수 있는 창이 바로 책이다. 뿐만 아니라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인간의 은밀한 내면, 망원경으로도 볼 수 없는 역사의 거대한 흐름도 볼 수 있는 창이 바로 책이다.
벽이 단절의 메타포이고, 창이 소통의 메타포라면 책은 바깥세상과의 소통을 꿈꾼다. 네모난 종이 뭉치는 미술이 되고, 음악이 되고, 연극이 되고, 대화가 되고, 놀이가 된다. 따라서 출판은 세상을 만드는 거룩한 설계와도 같다. 여기저기 창으로 가득하여 소통이 자유로운 세상. 죽은 활자가 유령처럼 배회하는 도시가 아니라, 살아있는 대화가 한 여름 분수처럼 솟구치는 도시. 책이 바라는 세상이란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어느 맑은 가을날, 홍대 거리에 늘어선 책들은 비루하고 지루한 일상의 감옥에 난 작은 창문을 소망했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의 작은 손이야말로 책의 소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다. 덮여있는 책은 한낱 벽에 불과하지만 펼쳐진 책은 세상과 소통하는 넓은 창이 된다.

권두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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