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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과 교주, 제자와 신도 사이에서
[160호] 2010년 04월 12일 (월) 복도훈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과『정치를 말하다』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옮김,『정치를 말하다』, 비,  2010

 이번에 출간된 일본의 세계적인 비평가인 가라타니 고진(1941~현재)의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 비, 2010)를 읽었다. 읽다보니 내가 가라타니의 책을 처음 읽은 지 대략 15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어로 출간된 20여권이 넘는 그의 책을 한권도 빼놓지 않고 읽어왔다. 그의 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개인적인 인연은 없더라도 가라타니는 나에겐 언제나 선생이었고, 나는 그의 제자였다.

가라타니 자신에 따르면, 선생은 새로운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또한 선생은 제자보다 앞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다. 선생(先生)은 앞에 있었던 것(先)을 살게 하는 사람(生), 남들이 죽었다고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여기는 것을 다시 살리는 사람이다. 선생은 낡은 것이 낡지 않았으며, 새로운 것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제자에게 말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끝났다고 합창할 때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이 새롭다고 주장할 때 포스트모더니즘이 낡은 것의 반복이라고 비판해야 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러주듯,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본주의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그런 위기를 먹고 사는 것임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것이 비평이고, 그런 사람이 선생이다.

비평은 새로운 이론에 혹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있는 반복의 오래된 구조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또 그렇기에 비평은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숙명을 지녔다. 그러지 않으면 제 아무리 뛰어난 사상이라도 자기 중독증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게 된다. 

이처럼 선생은 반복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그는 자기가 말한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가라타니의 책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정치를 말하다』라는 새 책에 새로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모두 이전에 저자가 썼던 것, 말했던 것의 반복이다. 그런데 이것을 자기표절로 치부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반복은 무언의 강조를 낳게 마련이다. 무엇인가가 반복된다고 강조하는 선생,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일조차 이전 것의 반복으로 예언하려는 자, 나는 그를 교주(敎主)라고 부른다.

내가 문학비평을 시작하던 2005년에 가라타니는 ‘문학은 끝났다’라는 근대문학의 종언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지금도 한국문학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근대문학의 종언은 문학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문학이 정치나 사회와 맺고 있는 이전의 밀접한 관계가 불가능해졌으며, 문학은 오락 비슷한 것이 되었다는 뜻이다.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는 가라타니가 반복을 가르치는 선생을 그만두고 예언을 하는 교주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결국 끝도 반복되기에. ‘문학을 떠나서 생각하라!’고 가라타니가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제자가 아닌 신도에게 행하는 주문(呪文)처럼 들렸다. 그 무렵 나는 어떤 글에서 ‘근대문학의 종언’을 문제 삼으며 처음으로 선생인 가라타니를 배반했다. 배반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선생이길 그만두고 교주가 되었다는 것 때문에 그를 거부했다. 단지 그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문학을 내가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를 말하다』에는 자본-국가-네이션에 대항한다는 모토로 세운 NAM(신연합운동)을 가라타니가 직접 해산시키게 된 저간의 사정이 쓰여 있다. 교주가 자기에게 모여든 신도를 해산시키는 법은 없다. 그때 아차 싶었다. 혹시 내가 교주로 변해가는 가라타니를 거부했을 때, 그때까지의 나는 그의 제자였을까, 신도였을까.

가라타니의 책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고 자부할 때, 나는 정말 그의 제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자는 선생을 언젠가는 떠나야 하며, 선생은 자신을 떠나지 않으려는 제자를 부담스러워 해야 한다. 선생을 배반하지 않는 제자는 제자가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신도가 되며, 선생은 선생을 배반하지 않는 제자를 신도로 붙잡아 두면서 교주가 된다.

어쩌면 선생과 교주, 제자와 신도의 관계는 해소 불가능한 아포리아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스승의 가르침을 지금껏 교주의 예언으로 들은 제자는 실은 아둔한 신도였던 셈. 이것이 선생 가라타니의 가르침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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