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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사랑, 혁명을 노래하다
서울대 라틴아메리카 HK연구교수
[158호] 2009년 11월 23일 (월) 박병규 @

‘네루다’라고 하면 영화 <일포스티노>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한때는 민중시인 못지않게 여성편력의 대가라는 이미지가 우세했다. 필자 역시 그러했다. 공개적인 석상에서는 ‘시, 사랑, 혁명’이라는 세 단어로 네루다를 정의하면서도 사석에서 만난 사람들이 바람둥이 아니냐고 넌지시 운을 떼면 ‘저 사람도 네루다 자서전을 읽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네루다 자서전이 어떻기에 이런 이미지가 생겼을까? 네루다 자서전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때는 1980년 1월이다. 이때는 1979년 10월 박정희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기 전이라 이를테면 간빙기 민주화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그 짧고 의심스러운 봄기운을 타고,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금서 목록에 오른 네루다의 자서전이 책방에 얼굴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완역본은 아니었다.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느닷없이 다가온 봄기운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책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1장부터 8장까지만 번역된 책이었다(나중에 원전에서 ‘소련 방문’이라는 9장의 첫 소제목을 보고, 그 당시 완역본 출간은 어려웠겠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자서전은 제1장부터 민중 시인이라는 네루다의 이미지를 산산이 깨뜨렸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정의의 깃발을 들고 온몸을 내던져 불의와 싸우는 투사다운 모습은 간데없고, 초장부터 밀짚 속에서 낯선 여자와 쾌락을 즐기는 바람둥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게다가 하룻밤 풋사랑의 장면 묘사도 농밀하다 못해 외설 수준이었다. 그 후에도 여성편력 얘기가 심심찮게 등장하는데, 네루다는 “사랑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어쭙잖은 클리쉐(cliché)로 포장하지도 않았다. 이야기는 날 것이고, 시인은 맨 얼굴이었다.

마찬가지로 민중 시인이 된 얘기에도 가식이나 허세는 찾을 수 없다. 스페인내전을 겪으면서 네루다는 “지붕 밑에서, 길거리에서, 정류장에서, 도시와 농촌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고, 관념이 아니라 피부로 현실을 만나고, 언어가 아니라 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권력이라면 생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네루다는 쑨원(孫文)의 부인 쑹칭링(宋慶齡)이나 자와할랄 네루(Nehru)나 피델 카스트로에게는 거침없이 서운한 감정을 털어놓으며, 힘없고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신산의 삶을 살아가는 민중에게는 굳건한 연대를 표시한다. “고통받고 투쟁하고, 사랑하고 노래하는 것이 나의 몫”이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진정성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손끝에 묻어나는 것이다.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두 번째 아내인 델리아 델 카릴에 대한 얘기가 빠졌다. 델리아 델 카릴은 20년 연상으로 15년 이상 부부연을 맺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눈을 뜨게 만든 정신적 지주였는데, 네루다가 당시 아내인 마틸테의 처지를 고려하여 일부러 누락한 것인지 아니면 원고를 탈고하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려고 필자의 번역본에 델리아 델 카릴 사진을 넣었다. 그런데 그만 착오가 생겨 마틸데 사진이 들어갔다. 2쇄에서 교체한 사진 속 인물도 사진 설명과 달리 여전히 마틸데다. 다음 기회에는 어떻게든 바로 잡을 생각이다. 이런 뜻하지 않은 찰과상에도 불구하고 네루다의 자서전은 격랑의 역사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는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훌륭한 책이다. 올해가 저물기 전에 네루다와 함께 역사와 인간 속으로 여행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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