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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케이션, 민중과 권력의 충돌
미디어를 통한 민주적 소통의 꿈은 과연 이뤄질 것인가
[156호] 2009년 09월 07일 (월) 이병주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강사

커뮤니케이션이 소수가 다수에게 발언하고 지시하는 것이라는 관념은 파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세례 받아 온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제거해야 한다. 민중을 통제하고, 그로부터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만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를…

-레이몬드 윌리암스-

   앞의 인용구는 미디어법 정국이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킨 염려들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인용구 중 “소수가 다수에게 발언하고 지시하는 것”과 “민중을 통제하고”는 정확히 “국민 세뇌프로젝트”나 “조중동 공화국(조중동에 의한 여론 독과점)”, 그리고 “MB의 장기집권 전략”으로 표출되는 전체주의에 질식된 민주주의에 대한 염려가 아닐까? 그리고 “돈을 버는 수단으로서만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이윤의 논리에 질식된 민주주의에 대한 염려가 아닐까? 따라서 이 두 염려를 묶어주는 매듭 점은 바로 민주주의이며, 더 정확한 표현을 부여하자면 민주주의와 언론(커뮤니케이션)과의 관계이다.

거대 미디어 복합기업의 등장과 조중동

   이 두 염려를 이번에 국회에 상정되었던 미디어법의 내용을 통해서 보다 명확하게 그려보자. 여러 뉴스 보도를 통해서 잘 알려졌듯이 미디어법은 크게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 보장에 관한 법률 전부 개정 법률안에 대한 수정안(신문법)’, ‘방송법 일부 개정 법률안(방송법)’,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사업법 일부 개정 법률안(멀티미디어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미디어 선도기업’을 육성하고 ‘글로벌 미디어 기업’을 키워내겠다는 공언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법안의 골자는 지상파 방송, 신문, 인터넷 매체, 케이블 텔레비전 등에 놓여 있던 소유제한의 장벽을 철폐 또는 완화함으로써 거대 미디어 재벌, 즉 거대 미디어 복합기업의 토대를 닦아 놓는 것이다. 물론 공식적인 표현은 “규제 완화”와 “자유화(그러나 동구사회주의가 자본주의화 되는 과정인 ‘marketization’이 ‘자유화’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자)”라는 완곡어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대 미디어 복합기업의 유력한 후보가 조중동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윤의 논리가 낳을 가장 나쁜 결과와 정치의 논리가 낳을 가장 나쁜 결과가 실제적인 가능성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현재의 미디어법 정국이다.

정치적 후퇴가 남긴 최악의 쟁점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역설이 있다. 이전에는 후정치적인(post-politics)상황 속에서 정치적인 쟁점이 되지 못했던 사안들이 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을 넘는 MB 정권의 과도한 행보 속에서 정치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설을 미디어 정책과 관련짓는다면 다음과 같다. 이전 정권들 또한 미디어 영역에 신자유주의―더 정확히 말하자면 21세기에 걸맞은 옷을 걸치고 다시 돌아온 고전적 자유주의―의 논리를 관철했으며, 이는 방송과 통신의 융합과 같은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미디어 독점과 복합 미디어 기업의 토대를 닦아 왔다. MB 정권이 더한 것은 단지 이 장기적인 흐름에 지상파 방송과 신문 간의 소유제한 장벽을 허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단지’이다. 왜냐하면, FTA와 민영화가 전면적인 정치적 쟁점이 된 것은 바로 ‘단지 더 해진 것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 문제’였듯이, 이 ‘단지’는 쟁점들의 ‘양적인 축적’만을 지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쟁점 그 자체의 ‘질적인 변화’ 또한 지시해 주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흐름이었던 차악은 용인될 수 있지만 ‘단지’가 덧붙여진 최악은 용인될 수 없다는 점, 따라서 조중동이 거대 미디어 복합 기업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거대 미디어 복합 기업에 대한 질문으로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잠시 커뮤니케이션과 민주주의 간의 근본적인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미디어를 통한 민주적 소통의 꿈

   외래어인 커뮤니케이션을 한자식으로 어근을 분리해 보면 [communication = community(공동체) +cation(~화)]이며, 따라서 단순히 ‘의사소통’이나 ‘메시지 전달’로 번역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화’라고 번역될 수 있다.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이란 말을 섞음으로써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 민주주의란 다수에 의한 결정이며, 사회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재형성되어야만 한다면 민주주의 또한 모두가 같이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커뮤니케이션과 민주주의를 묶어주는 것은 건네지는 것, 즉 말, 상징, 영상 등의 재현물들이며, 미디어란 특히 매스 미디어 또는 디지털 미디어의 테크놀로지란 재현물을 널리 전달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커뮤니케이션의 유토피아(누구나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미디어를 통해서 말할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서 사회가 민주적으로 형성되는)이며, 미디어법이 불러온 염려의 근원이 아닐까? 그렇다면, 미디어란 공기와 물과 같은 자유재인가, 아니면 공영방송과 같은 공공재인가, 민영방송과 같은 사유재인가? 흥미로운 점은 미디어가 이들 중 무엇으로 규정되는가에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는 주체의 지위가 달라지고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물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미디어 법은 미디어를 더 근본화된 사유재로, 즉 미디어 기업의 재산이자 미디어 기업의 이윤창출 도구와 사적이익 추구의 도구로 규정하고 있다. 이 결과는 무엇일까?

미디어 경제 논리에 빠진 수용자들

    이 점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지상파 방송의 지방관련 프로그램들을 살펴보자. 아마도 원래의 취지는 수도권보다 상대적으로 소외된 지방의 소식을 담으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프로그램은 수도권 집중의 문제이든지 지방의 낙후 문제가 아닌 천편일률적인 지방 특산물, 맛집탐방, 축제탐방을 다루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그 이유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파는 상품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수용자들이며, 지상파 방송사들의 고객은 수용자들이 아니라 광고주이기 때문이다. 지상파 방송국의 주된 수입원은 광고료이며, 따라서 광고주가 원하는 수용자의 시선을 프로그램을 매개로 광고주에게 팔아야 한다. 광고주에게 가장 매력적인 시청자는 물론 다수의 구매력 있는 중산층이다. 즉 지방민들의 말할 권리는 사라지고, 수도권 중산층의 응시를 위해 상연되는 스펙터클로 지방은 환원된다. 심지어는 축제에 목을 매는 지방행정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방이 스펙터클 그 자체로 변해간다. 흔히들 미디어 스펙터클은 실체가 없다고 하지만, 미디어 스펙터클의 실체는 바로 이와 같은 응시이다. 누구의 응시를 위해서 미디어 스펙터클은 상연되는가? 누구의 응시가 특권화 되는가? 이러한 미디어 경제의 논리에서 수용자들은 공중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상품이 된다.
    미디어 기업은 또한 수용자들을 소비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영화 같은 경우 미디어 콘텐츠 자체가 상품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의 자유화․민영화는 시장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에 수용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논리의 전제인 ‘수익자부담원칙(수익을 받는 사람이 그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는 원칙)’은 말해지지 않으며, 부정되는 원칙은 누구나 미디어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미디어의 공공성 원칙이다. 미디어 기업의 자유와소비자의 자유가 겹쳐지는 이 장밋빛 그림에서 제기되지 않는 질문은 누가 미디어 접근권에서 배제되는가이다. 그리고 다시 미디어 수용자들은 발언하고 평가하는 공중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수동적인 소비자들이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이 지속적으로 배제될까?
   이것은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이전에도 그렇게 흘러왔던 ‘차악’의 상황이다. 현재의 ‘최악’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여기에 ‘단지’를 덧붙이면 된다. 현재 국면에서 방송과 신문 겸영이 허용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은 삼각동맹, 즉 국가권력-자본권력-조중동권력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우리가 현재 겪어내고 있듯이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경제위기의 국면이며 어떤 형태로 귀결되든 거시적인 경제구조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문제에는 지난 쌍용자동차 문제와 같이 다양한 계급․계층들 간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더 큰 피해를 당하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들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권력동맹에는 하나의 교환이 가정될 수 있는데, 그것은 미디어 거대 기업은 정부의 관점을 대변하고 정부는 미디어 거대 기업의 독점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일례로 미국의 보수 미디어 재벌인 폭스 티브이는 오바마의 의료보험개혁 연설을 방송하지 않고 (우리나라식 표현으로) 예능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이것은 지난촛불 정국 때 보여주었던 보수언론의 모습이 아닐까?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미디어의 독점으로 말미암은 말할 권리와 들려질 권리, 즉 커뮤니케이션 권리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정치성과 민주주의

   정리해 보면, 미디어 법은 차악의 상황의 가속화이자 여기에 최악의 상황을 만드는 ‘단지’를 덧붙인 것이며, 그 결과는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커뮤니케이션과 민주주의간의 원론적인 관계들이다. 칼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자유주의 탄생을 목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데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입법 활동 대신 정부 행정 방법을 선호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의 제도 없는 행정’이라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유토피아이다. 우린 동일한 현상을 2009년도 대한민국에서 보는 것은 아닐까? 분명히 차악의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한다(미디어 법은 무효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단지’가 열어준 공간을 생각해 보자. 우린 어떻게 최악에서 차악으로, 그리고 그 다음으로 최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즉 커뮤니케이션권을 인권과 같은 보편적 원리로 정립해가면서 미디어-커뮤니케이션-민주주의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정치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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