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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LASSIC] 캉디드가 만난 현실의 다양한 얼굴
볼테르의 <캉디드>
[154호] 2009년 05월 04일 (월) 최복현 시인 · 수필가 · 번역가

“모든 사건들은 있을 수 있는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는 서로 연계되어 있는 것일세. 자네가 퀴네공드 양과의 사랑으로 인해 그 아름다운 성에서 엉덩이를 발로 차여 내쫓기지 않았더라면, 종교재판에 처해지지 않았더라면, 걸어서 아메리카 대륙을 누비고 다니지 않았더라면, 남작을 칼로 찌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엘도라도에서 가져온 양들을 모두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이곳에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 열매를 먹지 못했을 테니까.”


『캉디드』 말미에 낙천주의자 팡글로스가 캉디드에게 던진 말이다. 이 문장들은 소위 불어 식으로 말하면 조건법, 영어로는 가정법으로 하는 말이다. 과거나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지만, 만일 그 상황에 이런 조건이 갖추어졌더라면 이루어질 수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나타내는 문장이다.


이 작품은 캉디드라는 순진한 젊은이를 내세워 그것을 실험하고 있다. 매우 유순하고 고지식하고 순박한 소년 캉디드, 그는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순진하기 이를 데 없다. 일찌감치 팡글로스로부터 ‘세상은 최선으로 되어 있다’는 낙천주의 사상을 주입받은 캉디드는 그 기조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젊은 캉디드가 생각하는 첫 번째 행복은 툰더 텐 트롱크의 남작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것, 두 번째 행복은 퀴네공드 양으로 인한 행복이다. 세 번째는 날마다 그녀를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행복은 낙천적인 일들과 비관적인 일들을 모두 체험한 후에 오는 행복으로 작품 말미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전쟁에 참가한 캉디드가 시체를 보고 놀라는 모습  
 
일단 그의 이상적인 삶의 기쁨이라 할 3가지 행복은 그가 성에서 쫓겨나면서 깨어지고 만다. 요컨대, 낙천주의로 출발한 그에게 낙천주의에 대한 부정적 요소들의 투입이다. 우리의 캉디드가 남작으로부터 퀴네공드 양을 사랑한다는 의심을 받고 성에서 쫓겨나, 불가리아 군대에 들어가는 일, 아메리카에서 겪는 일 등 그가 만나는 일들은 최선의 상태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최악으로 되어 있다. 그가 가는 곳은 엘도라도를 제외하고는 어디나 추한 모습이며, 악한 모습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 순진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은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정치계, 종교계, 어디에나 온갖 부정들이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다. 이제 캉디드도 세상은 최선의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할 때가 온 것이다.  그토록 존경하는 팡글로스 선생이 가르쳐준 낙천주의 철학을 버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

 


이쯤에서 작가는 캉디드에게 비관주의를 주입한다. 온갖 부정적인 상황들을 접하고 난 후에 비관주의를 심어주기 위해 마르탱이 비관주의 또는 염세주의를 들고 나타난다. 그럼에도 우리의 순진한 주인공은 낙천주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하여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모두가 비관적인 일뿐이다. 심지어 그의 주변 인물들이나, 잊혔던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경험담 역시 온갖 추악한 일들뿐이다. 게다가 이상적인 사랑의 유토피아였던 퀴네공드 마저도 추한 꼴을 당할 대로 당한데다가 몰골도 아주 추한 상태이니, 가히 비관적인 일들뿐이다. 


이제 낙천주의를 버리고 비관주의로 갈아탔을 법한 캉디드 앞에 다시 나타난 낙천주의자 팡글로스, 모습은 변했으나 여전히 낙천적이다. 하지만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도 더할 나위 없이 부정적인 일들뿐이다. 그가 꿈꾸었던 유토피아, 종교적 피안의 세계는 예수회 신부들의 추악한 행위로 이미 무너졌으며, 여행 중에 찾아냈던 자연적인 유토피아 오레용 족의 모습도 결과적으로는 식인 족이라는 것으로  비관적이었고, 오직 그에게 각인된 진정한 유토피아는 엘도라도 뿐이니, 이는 철학적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에게 남아있는 유토피아는 이제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팡글로스는 조건법 과거를 사용하여 그나마 나아진 현실을 긍정적으로 볼 것을 캉디드에게 요구한다. 캉디드의 대답은 “참으로 명언이긴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낙천주의자도 비관주의자도 아니면서 캉디드는 현실주의자로 남아있을 뿐이다. 지구상에서 얻는 행복이란, 일을 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는 가정을 꾸리는 아주 작은 유토피아를 찾아낸 것일까? 이 시대에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종교계, 정치계, 문화계는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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