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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것들의 호흡 듣기
[신간서평] 김기택 시집 『껌』
[153호] 2009년 03월 30일 (월) 정영효 시인 · 국어국문학과 석사졸업
   
 
   
 

90년대 시단을 ‘기형도의 시대’라고 정의해도 될 만큼 89년 기형도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끼친 영향력과 파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젊고 유능한 시인의 갑작스런 죽음은 생전에 일부 사람들에게만 평가 받았던 작품들을 재조명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첫 번째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으로 발행된 『입 속의 검은 잎』은 이를 더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시에 대한 새로운 문법의 탄생. 범박하게 말하자면 ‘기형도식의 문법’은 20년이 지난 지금 시를 쓰고 읽는 이들에게도 그 자장을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한 시인이 시대를 대표하는 코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시라는 장르가 문학의 중심으로 위치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침체에 빠진 최근의 시단도 기형도가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문법이나 의식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시인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으며 불과 얼마 전까지 ‘미래파’로 호명되는 시인들을 집중 조명하며 다시 시에 온기를 채우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이처럼 89년은 기형도가 극장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해이면서 시단에 활력이 생긴 해로 보아도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김기택이라는 새로운 시인이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장하기도 한 해이다. 한 시인의 죽음과 한 시인의 등장. 90년대를 화려하게 수식했던 기형도는 아마 신인이었던 김기택에게 아주 ‘큰 산’처럼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첫 시집 『태아의 잠』(1991년)을 통해 자신만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지극히 일상적으로 지나쳤던 사물이나 짐승에 대해 천착하며 깊은 시적 사유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힘이 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동작인가. / 목 잘리지 않으려고 털 뽑히지 않으려고 / (중략) / 바위처럼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손아귀 끝에서 / 그러나 허공은 닭발보다도 힘이 세다.”(「닭」, 『태아의 잠』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김기택은 그만의 시안(詩眼)으로 익숙했다고 생각했지만 무심히 지나쳐버린 사소한 것들에 대해, 낯설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해석을 풀어낸다.

 닭이 맞이하는 죽음과 닭이 살아온 방식. 인간과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는 짐승을 통해서 그는 둘 사이를 관통하는 요소들을 들춰낸 것이다. 이후의 시집들 『사무원』, 『바늘 구멍 속의 폭풍』, 『소』 등에서도 그는 사물이나 짐승 더 나아가 도시인이 처해 있는 운명과 상황에 대해서 날카로운 시선을 들이대며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한데 /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있는 것 같다 // (중략) //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두고 /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소」, 『소』 부분)

노동으로 길들여진 ‘소’를 보며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하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눈과 그의 삶을 시인은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소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말 못하는 짐승의 처지가 일상을 쫓기며 살아가면서 내면의 목소리를 삼켜야 하는 인간의 그것과도 상통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가 형성하는 감동의 주파수는 증폭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김기택의 시들은 기형도와는 다른 그만의 문법으로 위치하여 90년대를 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진폭을 형성하였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묘사하는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김기택의 시들은 기형도뿐 아니라 다른 시인들과 구분되는 문법이었으며 이는 최근에 발행된 시집 『껌』(창비, 2009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빨들이 잊고 있던 먼 살육의 기억을 깨워 /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 지구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 제 한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갈고 짓누르다 / 이빨이 먼저 지쳐 / 마지못해 놓아준 껌 (「껌」, 『껌』 부분)

‘껌’을 씹는 것은 이빨들이 새겼던 기억을 불러오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누군가에게는 남은 시간을 채우는 수단으로, 또 누군가에는 그저 입 냄새를 없애는 편리한 식품으로 여겨질 수 있는 껌이 순간순간 인간이 생각하는 것들을 “한몸에 고스란히 받”으며 인내하는 희생자로 탄생될 때 하나의 사물이 가진 가치와 의미는 기존에 가졌던 그것들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김기택의 이런 시선은 기존에 그가 발표한 작품들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중견시인으로서 자신만의 색을 시단에 다시금 채색하는 장치가 된다.

한편 김기택의 이번 시집은 평론가 최현식이 지적하듯이 ‘죽음’이 주요 테마가 되었다.

죽은 지 여러 날 지난 그의 집으로 / 청구서가 온다 책이 온다 전화가 온다 // (중략) // 반송되지 않는다 / 눈 없고 발 없는 우편물들이 / 바퀴로 발을 만들고 우편번호로 눈을 만들어 정확하게 달려온다 (「본인은 죽었으므로 우편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껌』 부분)

우편물은 수취인이 있다는 전제로 누군가 보내는 것이지만 죽은 이에게 보내는 우편물은 전달될 수 없는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죽었지만 그의 죽음을 모른 채 계속해서 도착하는 우편물은 죽음으로 인해 허무하게 사라지는 존재에 대해 반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편물에 찍힌 이름은 자신의 처지와 상황을 가장 잘 알려주는 상징이지만 죽은 이에게 오는 우편물은 존재하지 않는 이에 대한 허무한 환기이면서 그의 부재에 대한 알림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간도 죽음 이전에서 배달되었다가 다시 죽음 이후로 반송되는 한낮 우편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김기택이 보여주고자 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일상에 놓여 있는 많은 사물들과 현상들을 고찰하는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의 이번 시집은 이전의 그의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최근의 경제상황과 여러 가지 사회문제로 지쳐 있는 이들에게 다시금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려해줄 수 있다는 데서 평범하지만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최근 문학이 처한 위기, 시가 소외 받고 있는 현상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한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작가의 인내력과 투지에 대한 격려가 『껌』이 남다르게 다가오는 이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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