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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 자서전 :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맑스주의자의 고독을 고백하는 그의 자서전, 유물론은 ‘목적지 없는 기차다’
[150호] 2008년 09월 01일 (월) 이병주 000

이 병 주 (경희대 언론정보학부 강사)

알튀세르의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를 읽으면 이상하게도 루카치의 『맑스로 가는 길』을 떠올리게 된다. 왜냐하면, 철학적 노선이 정반대이기에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두 철학자를 희미하게나마 연결해 주는 고리들 때문이다: ‘맑스로의 회귀―더 정확하게는 그 당시 맑시즘의 타락에 맞서 맑시즘을 옹호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라는 이들의 야심과 이들이 겪어내야만 했던 이론적, 그리고 이들이 더는 진지하게 언급되지 않는 이 땅에서의 갑작스러운 집단적인 망각. 공적인 자리에서건 사적인 자리에서건 ‘알튀세르’라는 이름을 꺼내면 즉시 이런 대답을 듣게 된다. “아직도 알튀세르인가요?” 번역된 지 15년이 흘렀고, 절판되었기에 이제는 도서관과 헌책방의 먼지 속에 감금된 이 책을 다시 펴 본다는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 아직도 알튀세르를 진지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왜 철학자가 맑스주의자가 되기 어려운지, 이 어려움이 어떻게 철학자의 고독을 만들어내는지 고백한다.  
 

 잘 알려진 대로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알튀세르가 자신의 부인을 정신착란 속에서 교살하고 난 뒤 정신병원에 갇힌 상태에서 집필한 책이며, 법적인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산 채로 매장된 사람’이 공적인 발언권을 되찾고자 집필된 책이다. 그러나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이 한국에서 출판된 93년, 이론적 정세의 맥락이 프랑스에서의 그것과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자서전의 프랑스에서의 출판은 발리바르의 증언(이론 2호)과 함께 알튀세르의 이론적 작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한국에서의 출판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망각의 서곡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이 망각의 서곡을 재기억―즉, 재인(re­cognition)―의 서곡으로 변주하려면 우리는 이 가냘프면서도 위태로운 자기옹호의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즉 어떻게 이 책을 ‘알튀세르여 안녕!’이라는 조사와 추모사가 아닌 ‘알튀세르로 들어서는 입구’와 환영사로 읽을 수 있을까? 이것을 위해서는 과거의 우리 지성계가 알튀세르로 들어섰던 좁은 입구와 알튀세르와 결별했던 넓고 다양했던 출구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즉 알튀세르의 계기들을.

 

 

알튀세르의 거의 모든 주요저작들이 물밀듯이 번역되어 소개되었던 때는 91년에서 93년 사이였고, 이 당시를 규정했던 문구는 ‘동구사회주의의 몰락과 맑시즘의 위기’였다. 이 문구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  첫 번째 반응은, 알튀세르의 길로, 맑시즘을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도 위기로 몰아넣었던 스탈린주의를 극복하고자 맑스 그 자신으로 되돌아가 맑시즘을 복원―사실은 재구성―하는 것.  두 번째 반응은, 다양한 포스트(post) 또는 탈(ex) 맑시즘의 길로, 맑스라는 부담스러운 짐을 벗고 더욱 자유롭게 니체, 푸코, 데리다, 하버마스와 같은 동맹자들과 제휴하여 비판이론을 재구성하는 것. 그 뒤 시간은 ‘호명’과 같은 알튀세르의 몇몇 개념들을 구태의연한 인용구로 남겨 놓은 채 흘러갔다. 마치 저자와 문제틀 없는 개념들을 고아처럼 남겨 둔 채로.

이것이 (어쩌면 개인적인 기억이겠지만) 한국에서의 계기라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와 『맑스를 위하여』의 서문 <오늘>에서는 알튀세르가 직접 서술한 알튀세르주의의 계기들이 등장한다. 발리바르의 경고대로 알튀세르의 자서전을 단지 스캔들을 일으킨 한 인간의 외디푸스 드라마와 외디푸스적인 변명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면, 즉 알튀세르의 계기들을 개인사의 계기들로 환원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가 읽어내야 하는 것은 알튀세르의 공적인 계기들이다. 즉 맑시즘은 역사 바깥에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성된 것이며, 그 역사가 제기하는 질문에 갇혀 있는 것이기에 항상 위기와 대면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 위기를 극복하는 몸짓 속에서만 맑시즘은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위기와 극복이라는 반복―즉, 차이의 반복―이 알튀세르의 고유한 계기라는 것을. 다시 반복하자면 알튀세르의 계기는 자본론의 맑스의 계기, 그람시의 계기, 더 멀게는 루카치의 계기와 같은 반복의 계열에 있다는 것.

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유물론을 ‘목적지 없는 기차’로 정의하고 있으며, 자서전의 마지막 부분에서 타인의 말을 빌려 자신의 살인행위를 결정된 경향성과 우연적인 요소 간의 변증법으로 해명하고 있다. 물론 이 정의는 그의 유명한 테제인 ‘역사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의 은유로서 읽힐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질문을 던져보자. 알튀세르의 개념들은 과연 이해된 적이 있었는가? 사람들이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또는 계급투쟁의 결정)을 환원주의로 기각할 때, 알튀세르의 ‘부재하는 원인으로서의 구조적 인과성’이라는 개념적 성과 또한 너무 성급하게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가 ‘접합’을 이야기할 때 상부구조와 토대 간의 조응은 사회구성체 접합의 사후적 효과라고 말한 것은 가장 탁월한 비(非)본질주의적인 맑스주의가 아닐까?

알튀세르는 자서전에서 솔직한 심정으로 왜 철학자가 맑스주의자가 되기 어려운지를, 이 어려움이 어떻게 철학자의 고독을 만들어내는지를 고백하고 있다. 철학자의 말의, 테제의 건넴이 자신의 고독에서 벗어나는 행위라면, 우린 알튀세르를 도와줄 필요가 있다. 그가 맑스에게 건넸던 말을 그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그의 말대로가 아니라 그의 작업대로 받아들일 그의 의무―모든 역사가들의 의무―를 다하게 하자.” 그럼으로써 우리(좌파)들의 정치적 고독을 극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의 자서전과 함께 『맑스를 위하여』, 『자본론을 읽는다』를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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