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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보약선호 현상
농업생산력 향상, 화폐경제 발전, 세금제도 개선으로 인한 구매력 증가가 원인
[148호] 2008년 04월 14일 (월) 김정선 서울대 의과대학 초빙교수, 의학박사

근대 이전 우리나라 의학의 주류는 오늘날 “한의학(韓醫學)”이라 불리는 한반도의 전통의학이었다. 하지만 18세기 이전까지 이러한 한의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던 대상은 일부 특권 계층에 한정되어 있었을 뿐, 일반 대중은 그 혜택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1123년 송(宋)나라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은 “고려의 오랜 습속에 사람들은 병이 나도 약을 복용하지 않고 귀신 섬기는 것만 알고 병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려 저주하는 주문을 일삼는다”라고 했으며, 1653년 조선에 표류했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은 “조선인들은 많은 약초를 재배하지만 일반인들은 거의 그 약초를 쓰지 못한다. 의원은 고관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일반 백성들이 의원을 부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

일반 백성들은 의사 대신 장님이나 점쟁이를 찾는다”라고 당시 조선 의료의 풍경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고급 의료였던 한의학의 혜택이 민중에게까지 확산된 시기는 18세기부터이다. 18세기에 이르자 농업생산력과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였고, 대동법과 균역법 등 세금제도의 개선과 더불어 민간에서의 구매력이 커지게 되었다. 아울러 약재시장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고, 『산림경제(山林經濟)』와 『광제비급(廣濟秘 )』 같은 간편한 의서가 보급되었으며, 의료에 대한 합리적 인식의 확대와 더불어 민간의료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 의료는 민간의료가 성장함에 따라 정부가 주도하는 형태에서 민간이 주도하는 의료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884년 조선을 방문한 미국 해군의 외과의사인 조지 우즈(George W. Woods, 1858-1932)는 “조선인들은 중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약물 소비자의 나라이며, 약국들이 수없이 많다.  조선인들 사이에 미신적인 의료는 중국인들보다 드물다고 결론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당시 조선의 의료상황을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한의학의 변화 가운데 두드러진 것으로 ‘보약’을 선호하는 경향을 들 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녹용과 인삼을 체력을 북돋는 보양강장제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는데, 일본과 중국의 전통의학과 견주어볼 때 특히 한국의 전통의학에서 이러한 보양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더욱 강조되어 왔던 경향이 있다. 지금도 한국인들의 인삼(홍삼)의 선호도는 매우 높고, 한국인들은 전 세계 유통량의 80%가량의 녹용을 소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건강과 질병에 대한 사회의 관념은 오랜 시간을 걸쳐 변화하며 이루어진 것으로, 우리 의학사가 빚어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의학사를 돌이켜 볼 때 뚜렷하게 보약을 선호하게 된 시기는 영조 연간부터였다. 향년 83세로 조선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장수를 누렸던 영조는 평소 건강관리에서 양기(陽氣)를 북돋는 보양법(補陽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영조는 자신의 장수와 건강의 비결을 인삼의 정기(精氣)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조는 72세 때 1년간 복용한 인삼이 20여근(약 6㎏), 59세부터 73세까지 복용한 인삼은 100근이 넘을 정도로 자주 복용했다고 한다.

이후 값비싼 인삼은 비단 국왕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매우 선호하는 약재가 되었다. 18세기 후반 사대부인 유만주(兪晩柱, 1755-1788)는 다음의 기록에서 영조 연간부터 인삼 값이 폭등했으며, 당시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까지 인삼복용을 즐기게 되었던 새로운 민간의 의료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인삼은 동방의 지금 세상에서 제일의 보배이다. 대개 지금 세상에서 그것이 사치스러운 것이 되었으니 값이 매우 비싸기 때문이다.

숙종 말년에 인삼 1냥이 3, 4냥에 불과했는데, 영조 초년에 이르러서는 인삼 1돈(錢)이 3, 4냥이어도 오히려 비싸다고 하지 않았다. 영조대부터 어삼(御蔘) 이후에 임금이 쓰는 나삼(羅蔘) 1돈이 5, 60냥이고, 사대부 집에서 쓰는 약간 열등한 것으로 1돈에 16, 7냥이다. 매우 가난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비록 여항이라도 먹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세상이 변했음을 볼 수 있다.”(『흠영(欽英)』, 1778년 7월 9일) 또한 당시 유만주는 보약에 대한 지나친 남용의 폐단을 지적했을 정도로 일반인들이 보양강장제를 매우 선호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세상 의원의 처방에는 반드시 인삼·녹용·계피·부자가 나오니, 이는 즉 시체(時體)의 의원의, 시체의 약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환자나 옆에서 보는 사람이 모두 그것을 약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의리(醫理)와 약리(藥理)가 일찍이 이 같은 적이 없었다. 인삼·녹용·계피·부자를 마땅히 써야할 환자와 쓰지 말아야할 환자가 모두 함부로 사용하니 어찌 약체(藥體)를 이루겠는가?”(『흠영(欽英)』, 1786년 7월 6일)

한편, 임진왜란 직후에는 잠시 동안 국왕들의 질병치료에 약물치료보다도 침구치료가 자주 사용되곤 했었는데, 19세기에 가까워지면서 내의원에서 담당했던 국왕에 대한 치료는 거의 모두가 약물 위주의 치료였다. 사실상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유만주와 같은 양반들은 값싼 침구치료보다는 약물치료를 선호하였고, 건강관리를 위해 값비싼 인삼과 녹용이 들어간 보약을 자주 복용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웃나라와 비교하여 한국인이 유독 보약을 선호하는 경향은 이러한 조선 후기 이후의 의학사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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