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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표상할 수 없는 기억에 관하여
[146호] 2007년 12월 03일 (월) 박우성 영화영상학과 석사수료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이하 ‘고양이’)로 우리에게 친숙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최신작 <초속5센티미터>(이하 ‘초속’)는 기억에 관한 영화다. 13살 무렵의 한 소녀와의 추억을 떨쳐버리지 못해 3년 동안이나 사귀었던 여자와도 헤어지고 급기야 회사도 그만둔, 어찌 보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지지리도 ‘못난’ 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 때문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감히 말하건대 <초속>에서의 기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억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그 무엇이다. 왜 사내 ‘타카키’는 기억에 그토록 얽매이는 것인가?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런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초속>에는 왜 청년 ‘다카키’가 첫사랑 ‘아키라’와의 풋사랑을 망각하지 못하고 현재를 배회해야만 하는지, 혹은 도대체 무엇이 ‘타카키’를 그토록 청승맞게 하는지에 대한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런데 더더욱 이상한 것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됨에도 불구하고 진한 감동이 배어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시놉시스만 따지만 정말이지 유치하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동안 그런 ‘타카키’의 행동이 너무나도 진지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감독의 또 다른 영화 <고양이>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작품 역시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단적으로 말해 채 5분도 안 되는 러닝타임동안 무슨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이 작품은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5분 동안 끊임없이 작렬하는 ‘빛’, 혹은 ‘빛’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우리의 감정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양이>는 빛에서 시작해 빛으로 끝난다. 이런 상황은 <초속>에도 연출된다.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바닷가에서, 도쿄의 밤거리에서, 전철역에서, 전철 안에서, 아파트에서, 길거리에서, 벚꽃이 만발한 곳에서, 기타 그 어떤 곳에서든 ‘빛’은, 앞뒤좌우 할 것 없이 대상의 세밀한 부분들과 조우하며 미세하고도 강렬한 숨결을 남긴다.

그러나 이것 말고 실제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따로 있다. 그것은 ‘말’이라는 도구로는 앞서 말한 빛의 작렬을 도무지 온당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빛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와 언어로는 도무지 재현할 수 없을뿐더러 설령 그렇더라도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수많은 잉여를 남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사를 추동하는 한 축인 ‘빛’의 묘사가 그러하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카키’의 기억도 비슷하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초속>은 총 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제1화. 부모의 전근 탓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질 수밖에 없는 12살의 ‘타카키’와 ‘아키라’가 있다. 편지로만 그리움을 전하다 1년이 지난 후 폭설을 뚫고 기어이 재회하고야 말았을 때 불현듯 이어지는 둘의 감동적인 첫키스! 이 순간 ‘타카키’는 지난 13년의 세월이 한순간으로 응축된 것 같은 어떤 영원성 같은 것을 느꼈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무참히 빠져버린다. 우리는 이런 역설적 심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제2화. 고3의 ‘타카키’가 (핸드폰이라는 게 생겨) 끊임없이 문자를 작성하던 중 갑자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낼 곳이 없는 문자를 쓰는 습관이 생긴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렇다. 그는 보내지도 않을 문자를 끊임없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보내지도 않을 문자를 작성하면서까지 어떻게든 표현해야만 했던 감정의 굴곡을, 그렇기 때문에 단지 몇 마디 단어로는 도무지 표상할 수 없는 ‘타카키’의 심사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제3화로 넘어가서 세월이 많이도 흘러 직장생활을 하는 ‘타카키’가 있다. 또한 그의 옆에는 3년이나 사귄 여자친구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단 1센티미터도 가까워지지 못했다.

 ‘타카키’의 마음속에는 첫사랑 ‘아키라’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도쿄 시내를 돌아다닐 때마다 그는 언제나 되새긴다. 혹시 우연이라도 ‘아키라’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셈이다. 13살, 첫키스가 기억될 때의 그 역설적인 심사, 문자 따위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도 보낼 수도 없는 고3 ‘타카키’의 복잡한 감정의 굴곡, 어른이 되었어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도래하는 ‘아키라’에 대한 기억. 영화는 이런 것들에 대해 일말의 해명도 없이 그냥 그렇게 끝나버린다.

너무나 허망하지 않은가. 우리는 왜 감동했던 것일까? 도대체 감동을 하기는 한 것인가? 그러나 그 원인을 따지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그간 ‘타카키’에게 던졌던 우리의 질문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 말하자면 첫사랑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타카키’에게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다. 그런 특별한 사연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이 텅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기억을 벗어던질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우리와 마찬가지로 ‘타카키’ 역시 첫사랑과의 기억을 도무지 언어로 온당히 표상할 수 없었고, 때문에 그것을 단순히 ‘과거형’으로 순치하기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말장난 같은 논리지만 그렇지 않다면 ‘타카키’의 신체에 여전히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도래하는 그 낡은 ‘기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요컨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카키’가 기억을 한 것이 아니라 기억이 ‘타카키’에게 불현듯 도래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무기력에 빠져 직장까지 관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현듯 도래하는 낡은 기억에 ‘타카키’가 철저히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초속>을 보고 감동했던 이유는 비록 그것이 유치한 외피를 지녔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을 법한 기억의 기저를 ‘빛’의 미묘한 공명과 함께 끊임없이 현재형으로 작동시키기에, 우리 역시 무기력할 수밖에 없으므로…….

박우성 (영화영상학과 석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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