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9.27 금 20:33
인기검색어 : 등록금 인상, 총장선출,
신문사소개 | 호수별 기사보기
> 뉴스 > 문화 > 영화 및 관극평
     
왜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을까?
-봉준호의 〈괴물〉을 보다
[135호] 2006년 09월 04일 (월) 강성률 영화평론가


아마 이 글이 활자화되었을 때에는 〈괴물〉이 새로운 한국영화사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려 130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이 이 영화를 봤다는 말이다. 말이 1300만 명이지, 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드는 숫자이다. 그것도 (불법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다운로드나 비디오가 아니라 오로지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만 1300만 명이라는 것은 신드롬 외에는 다른 용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이제 〈괴물〉을 보지 않으면 대화에서 ‘왕따’ 당한다.

1300만 명이라는 숫자가 실감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조금만 설명하자. 현재 한국 인구는 4800만 명 정도다. 이 가운데 자신의 의지로 영화를 보지 못하는 초등학생 어린이와(어차피 이 영화는 12세 관람가이다), 극장과 ‘원수가 져서’(?) 극장을 거의 찾지 않는 50대 이상의 관객을 제외하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남을까? 아마 3000만 명 이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가운데 영화관 시설이 빈약한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영화를 볼 수 없는 군인을 제외하면 더 많은 수가 빠진다. 그런데도 1300만 명이 영화를 봤다는 것은, 대낮에 도시를 거니는 15세 이상 40세 미만의 사람 가운데 무작위로 선택해도 둘 가운데 한 명은 〈괴물〉을 봤다는 말이 된다. 이 글을 읽는 이들도 반 이상은 〈괴물〉을 본 것이다.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사실 〈괴물〉은 괴수영화로서 흥미진진한 영화는 아니다. 핵심 아이템인 괴물의 형상이 영화 초반부부터 노골적으로 공개되면서 괴수영화 특유의 긴박감은 떨어진다. 이길 수 없는 괴물의 치명적인 약점을 공략하기 따위의 애간장 녹이는 사건도 없다. 그렇다고 ‘죽이는’ 스릴이 있거나, 드라마가 탄탄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진지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웃음이 터져 감정적 동일시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괴물〉은 장르의 규칙을 따르는 척 하면서 어느 순간 모조리 비틀어 버린다. 그런데 왜 이 영화가 이토록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모으(고 있)는 것인가?

한 영화가 신드롬이 되면 언론이 먼저 호들갑을 떤다. 언론은 이 영화의 흥행을 가족영화에서 찾는다. 가족영화의 감동이 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함께 보면서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에서 믿을 것은 가족밖에 없다. 돈 못 벌고 아프면, 오로지 가족에 의지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도 현서의 가족 외에는 누구도 현서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권력, 언론, 공무원은 방해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가 가족주의를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왜 감독은 ‘가족의 꽃’인 현서를 결국 죽이고 마는가? 가족영화라면 악전고투 끝에 현서를 구출한 후 온 가족이 모여 행복한 결말을 맞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현서를 죽였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현서를 죽였기 때문에 이 영화의 감동이 발생하는 것인가? 다시 물어보자. 이 영화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정상적인 가족이라고 할 수 없는 이들이 결국 괴물을 물리치는 장면은 분명 감동적인데, 괴물을 물리친 후 그들은 한강 둔치에서 같이 모여 살아가는가? 다시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괴물〉은 가족주의에 전적으로 기댄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족의 해체를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김기덕의 〈시간〉이 배급사의 냉소를 받으면서 〈괴물〉은 전국 스크린의 1/3 이상을 먹어치우는 ‘괴물’로 비판받았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괴물〉이 스크린을 독점하면서 문화적(또는 영화적) 다양성을 죽인다는 것이다. 관객의 선택권을 원천적으로 침해한다는 면에서 맞는 말이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괴물〉을 상영하기 싫다는 극장을 위협해서 강제로 상영한 것이 아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것이다. 정말로 〈괴물〉이 놀라운 것은 스크린 수보다 더 빠르게 관객들을 집어삼키는 ‘속도’에 있다.

도대체 왜 관객들은 이 영화를 엄청난 속도로 매진시키는 것일까? 한 영화가 이토록 엄청난 흥행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이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그 무엇’이 있음을 말한다. 영화 속에 있는 ‘그 무엇’이 집단 무의식을 건드리며 공명하기 때문이다. 올해 개봉한, 내로라하는 스펙터클을 자랑하는 할리우드의 대작들도 겨우 400만 언저리에 머물렀는데, 〈괴물〉이 1300만 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할리우드 영화가 담지 못하는 그 무엇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 속에서 그것을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학과 출신인 386세대 봉준호 감독은 한국에서는 매우 드물게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대중영화의 장르 틀 속에 녹여내는 감독이다. 단편 시절부터 그는 줄곧 한국 사회의 미묘한 모순을 다루었는데, 장편 데뷔 이후에도 그것은 그대로 이어졌다. 그의 영화는 장르의 규칙을 지키는 듯 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진부한 듯 하면서 새롭고, 새로운 듯 하면서 진부하다. 이런 형식 속에 봉준호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은 이 영화가 다루는 소재가 그리 큰 흡인력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 강사의 비애는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소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은, 기존의 형사 영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도 않고 영화 내내 음침한 하수구에 빠진 듯한 느낌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을 이끌었다. 이것은 1980년대라는 억압적 철권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차용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고여 있던 어두운 그 기억을 적절하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괴물〉에서는 ‘빠방한’ 집안의 자식이 아니라 ‘지질이도’ 못난 집안의 자식을 찾아나서는 일가족의 모험을 다룬다. 유괴된 사람은 연인이나 부모가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중학생 딸이다. 자식에게 유별난 애착을 느끼는 한국인에게는 적당한 소재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유괴된 딸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떠올릴 어이없는 대형사고의 기억, 졸속적 사후처리, 언론의 호들갑,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복지부동의 관료주의와 미국의 영향력을 연상시킨다. 결국 〈괴물〉은 우리 사회의 ‘모순의 종합선물세트’인 것이다. 이 영화의 흥행은 많은 부분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강성률 영화평론가

ⓒ 동국대학원신문(http://www.dgugspres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페이스북 방문해 주세요!
더 많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육방송국 동국대학원신문 동대신문 동국포스트
동국대홈동국미디어컨텐츠 센터동대신문교육방송국동국포스트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4620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 1길 30 동국대학교 학술관 3층 대학원신문 | 전화 : 02-2260-8762 | 팩스 : 02-2260-8762
발행인 : 윤성이 | 편집인 : 김대욱 | 편집장 : 김태환 | 발행처 : 동국대학교 대학미디어센터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우
Copyright DGUGSPRES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gupress@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