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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론―차이 ‘속’의 유령
민승기/경희대 영문학부 겸임교수
[145호] 2007년 11월 05일 (월) 임세화 편집위원 farewell_i@hanmail.net
   
  같은 공간에 거주할 수 없는 두 기둥이 ‘함께’ 있다. 헤겔(Hegel)과 쥬네(Genet)라 불리는 기둥. 철학/문학, 적자/서자, 진리/비유, 체계/파편, 남성/여성, 아버지/어머니, 집/방랑, 가족/사생아, 법/범죄라는 대립항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모든 것을 포착하는 하나의 눈을 가진 헤겔과 고아, 죄인, 복장도착, 사기꾼, 도둑, 거지 등으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는 쥬네가 ‘함께’ 있는 것이다. 데리다(Derrida)는 『조종』(Glas)에서 헤겔과 쥬네라는 대립적 차이를 동일한 공간 속으로 회집한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자연 종교를 논하면서 식물과 동물의 종교를 말한다. 이것은 곧바로 쥬네를 불러들인다. 쥬네는 스페인산 말(genet)인 동시에 금작화라 불리는 꽃(genêt)이기 때문이다. 잉여물을 다루고 있는 쥬네의 칼럼(기둥) 역시 ‘헤겔’ 체계의 잉여물, 헤겔 체계가 소화하지 못해 토해낸 파편들이다. 대립적인 차이처럼 보이는 헤겔과 쥬네의 칼럼은 이미 서로에게 말을 걸고 있다. 헤겔의 자연 종교 속에서 쥬네가 숨쉬고 있고 헤겔 역시 쥬네의 파편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 헤겔과 쥬네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서로를 와해시킨다. 외재적 차이는 내부적 분열을 숨기고 있다. 해체론은 외부적 차이(between)를 내부(within)로 옮김으로써 내부적 분열이 외재적 차이의 가능조건임을 보여준다. 쥬네는 헤겔 속의 빈 공간, 헤겔은 쥬네 속의 구멍이며 바로 이 구멍, 내부적 타자가 각 체계를 가능하게 한다.
  헤겔 칼럼과 쥬네 칼럼 모두 유다의 구멍(juda's hole)이라 불리는 엿보는 구멍을 품고 있다. 스스로는 노출되지 않은 채 열쇠 구멍을 통해 모든 것을 보고 있다고 상상하던 주체가 등 뒤의 낙엽 밟는 소리에 자신이 이미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유다의 구멍은 체계 속에서 체계가 노출되는 공간이다. 그것은 철학(헤겔) 속에서 철학의 시선이 닿지 못하는 눈멈의 공간이요, 문학(쥬네) 속에서 문학의 결핍이 드러나는 구멍이다. 라캉(Lacan)의 응시(gaze)처럼 유다의 구멍은 시선(eye) 속에서 시선을 배신하는 바깥, 안에서 안을 넘어서는 바깥, 이미 안의 안인 바깥이다. “나는 문학도 철학도 아닌 공간(아닌 공간)에서 서성거려왔다”는 데리다의 말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조종』에서 데리다의 작업은 헤겔 칼럼과 쥬네 칼럼의 ‘사이,’ 문학의 결핍과 철학의 결핍이 겹치는 이중 결핍의 공간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과 쥬네 ‘사이,’ 헤겔 속의 쥬네, 쥬네 속의 헤겔에서 출몰하는 것은 헤겔이자 쥬네이며, 헤겔도 쥬네도 아닌 ‘헤겔-쥬네’라는 유령이다. 해체론은 이 유령에게 말을 건네고 그것을 환대하는 열림이다.
  대립구조적 차이와 내부적 분열을 동시에 지시하는 데리다의 공간은 그러나 다양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데리다의 자서전 역시 이질적인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세로 열(column)이 아닌 가로 열을 통해 이질적인 것들이 접목된다. 위쪽에는 베닝톤(Bennington)의 데리다 논의가 전개되고 아래쪽에는 거세와 고백이 겹치는 써컴페션(circumfession)이라는 데리다의 글이 이어진다. 데리다를 이론화하려는 베닝톤의 작업은 마치 데리다의 글쓰기에 의해 거세되는 것처럼 보인다. 쓰면서 지워가는, 이론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하는 데리다라는 혼합괴물은 다양한 의미가 아닌 의미의 불가능성을 지시한다. 틀(frame)을 논하는 『회화 속의 진리』에서 본문은 본문 속의 틀(처럼 생긴 구멍)에 의해 틀지워져 있다. 닫힘이나 종결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틀이 열린 빈 공간이 되어 의미의 흐름을 중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틀을 틀지우는 텍스트 내부의 빈 공간(틀)은 그러나 지울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라 본문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텍스트는 빈 공간으로서의 틀을 포함할 때 비로소 텍스트가 된다. 틀은 비어있기 때문에 내용상의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 공간이지만 텍스트에 첨가됨으로써 텍스트의 결핍을 드러낸다. 그것은 텍스트의 맹목이지만, 암점이 시력을 가능하게 하듯 텍스트의 존재조건이다. 불가능성과 가능성이 같아지는 공간. 닫히면서 열리는 공간. 데리다의 공간은 스스로를 해체하는 공간(내기)을 이미 품고 있다. “우리 모두 공간을 갖자.”
  의미가 차이를 전제한다면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은 차이를 모르는 혼돈이다. 남성과 여성이 뒤엉켜 있는 마그리트(Magritte)의 『거인의 시대』는 남성과 여성의 오염, 남성이자 여성이며, 남성도 여성도 아닌 공간을 지시한다. 『두 가지 신비』에서 허공에 떠있는 파이프는 구조적으로 보이지 않는 빈 공간과도 같은 것이다. 유다의 구멍이나 텍스트 내부의 틀처럼 허공의 파이프는 이론이 사유하거나 애도할 수 없는 요소 그러나 이론의 생성에 관여하는 요소이다. 허공의 파이프는 사실 그림 속의 파이프와 겹쳐 있다. 재현 대상으로서의 파이프의 이면, 재현이 볼 수 없는 곳에 그것은 이미 들어와 있다. 허공의 파이프는 상징적 재현 속에서 재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유령으로 출몰한다. 재현 ‘속’에서 재현을 ‘넘어서는’ 바로 이 공간에서 데리다의 글쓰기가 시작된다. 글쓰기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거기 있는 유령과의 만남이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규정될 수 없는 미래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동시에 현재가 파악할 수 없는 형태로 이미 발생하고 있는 불가능한 것이다. 유령은 이론의 바깥이 아닌 이론 ‘속’의 빈 공간이다. 철학이 포착할 수 없지만 이미 철학 속에 깃들어 있는 유령이 철학을 철학 이상이게 한다. 철학은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을 이미 품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유령들과 함께 읽고 쓰며 행동한다.”
  『조종』은 철학의 죽음을 애도하는 종이다. 그러나 데리다에게 철학의 죽음은 글쓰기의 시작을 알린다. 글쓰기는 철학 속에서 충분히 살해되지 않아 다시 돌아오는 유령의 귀환이다. 이론 ‘이후’에 오는 것은 이론의 소멸도 또다른 이론의 탄생도 아니다. ‘이후’에 올 것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미 있었지만 아직 의미를 부여받지 못한 이론의 잉여물이다. 이론 ‘이후’의 시대에 우리는 이론 이전에 이미 있었고 다시 돌아올 것으로 남아있는 유령과 만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론의 종언을 선언하기 전에 다시 이론(의 잉여물)으로 돌아가야 한다. 괴물의 모습으로 오는 잉여물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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