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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세자빈은 잠 못 이루고
경기도 화성시 융건릉 답사
[220호] 2022년 05월 09일 (월) 인준영 편집위원
   
  △ 융릉 전경 (사진 : 인준영 편집위원)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지만 보는 만큼 알아갈 때가 있다. 일례로 고전 건축 문화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도 조선왕릉의 소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우리의 왕릉이 현재 관점에서 보더라도 대단히 세련된 기억의 공간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며 왕릉까지 이어진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레 생각에 잠긴다. 고요하되 스산하지는 않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장엄하다. 그리하여 왕릉의 재실이나 봉분만이 아니라 묘역 자체에서 느껴지는 기풍은 왕릉을 다녀온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왕릉이란 단지 죽은 왕 개인만이 아니라 그의 시대와 그 서사가 함께 안장된 곳이기 때문일 터이다.

   경기도 화성시의 융건릉도 마찬가지였다. 융건릉은 융릉과 건릉을 합친 말로 융릉에는 사도세자 부부가, 건릉에는 정조 부부가 합장되어 있다. 입구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금천교와 홍살문이 보이는데 속세와 능을 구분하는 상징이다. 이들을 통과하면 본격적으로 능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겠다. 홍살문을 기점으로 선왕의 혼령과 왕의 길인 향로와 어로가 능을 가로지르고 길의 끝에는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정자각이 자리한다. 정자각은 능의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만고의 세월을 능과 함께한 능의 벗 같으면서 맞배지붕마다 달린 풍판이 한복의 옷소매처럼 보이며 죽어서 왕을 지키는 가신처럼도 보인다. 정자각 뒤편에는 봉분이 자리한다. 사람의 시선을 아득히 넘는 언덕은 사람들이 자연히 봉분을 우러러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봉분의 공간은 능침공간이라 부른다. 산 자와 죽은 이가 공존하는 왕릉에서 이곳은 오로지 죽은 이를 위한 공간이다. 현대에도 울타리를 둘러 방문객들의 진입을 제한한다.
조선왕릉은 『국조오례의』가 정한 바에 따라 엄격한 규정에 의해 지어진다. 그러므로 전체 양식은 왕릉마다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융릉도 그렇다.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증된 것은 정조 사후 고종 시기의 일임에도 정조는 생전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화성으로 이장할 당시 묘를 원으로 승격함과 동시에 정자각의 규모 등을 왕릉과 동일하게 조성했다. 

   시대의 서사마다 특징을 붙이자면 정조 시대의 서사는 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력한 개혁국가를 만들겠다는 정조의 꿈. 그 꿈의 일부는 수원과 화성에서 펼쳐졌고 한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죽음 중 하나였던 아버지의 추모도 그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융건릉은 정조 시대 꿈의 시작이자 정점이고 끝이다. 현재의 우리도 여전히 그 꿈속에서 살아가 여전히 각종 매체에서는 정조가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꿈은 말 그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우리는 정조 사후 참혹했던 역사를 알기에 그의 치세가 조금 더 길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으로 그 시대의 꿈을 그린다.

   하지만 융건릉의 또 다른 주인인 혜경궁 홍씨의 꿈은 어디에도 없었다. 1762년, 정조가 아버지를 잃었듯 혜경궁은 남편을 잃었고 뒤이어 생전에 부친을 여의고 아들을 떠나보냈음에도 말이다. 그녀의 저서『한중록』을 읽다 보면 그녀에게 남편의 사망은 그녀 일생에 닥친 시련 중 지극히 일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자가 명을 달리했어도 세손은 왕위를 이었어야 했기에 사도세자 사후 세손 정조는 이미 사망한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그날의 참변에 대해 대신들은 국왕인 영조와 정조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으므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세자의 장인이자 혜경궁의 부친인 홍봉한이 짊어져야 했다.

   홍봉한뿐만 아니라 그녀의 외가는 영조와 정조의 치세 그리고 정조 사후 온갖 구설에 휘말렸다. 혜경궁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그녀의 외가는 ‘조물주가 번성을 꺼리는 듯’ 했다. 비로소 아들이 국왕이 되며 여한이 씻기는 듯했지만, 정조는 외가의 억울함을 1804년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준 후 처리하겠다는 약속만 반복했다. 그리고 정조는 1800년 사망한다.

   혜경궁의 일생은 눈물이었다. 남편을 잃은 날 눈물을 드리웠고 아들이 왕이 되어 남편의 묘와 마주할 때 땅에 눈물을 고여냈다. 그리고 그녀는 참았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참변의 중심인 영조를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모자가 목숨을 보존한 것도 왕의 은혜’라고 이야기하며 참았다. 버텼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한마디가 자식의 왕위에 누가 될지도 몰랐으니까, 세손인 아들이 왕이 되면 괜찮아질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의지했던 아들마저 떠나보내고 집안이 ‘역적’ 소리를 듣는 지경에 이르자 혜경궁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 처음으로 저항한다. 궁궐의 모든 문안을 거부한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그녀의 10살 어린 시어머니인 정순왕후는 ‘뒤에서 혜경궁을 부추긴 세력이 있을 것’이라며 그녀의 셋째 동생을 귀양보낸다. 혜경궁의 목숨을 건 처음이자 마지막 저항은 그렇게 어이없이 막을 내렸다. 혜경궁은 그로부터 눈물의 날을 16년이나 더 보내고 나서야 세상과 이별하고 남편 곁에 합장된다. 한중록의 또 다른 이름은 ‘읍혈록’, ‘피눈물의 기록’이다.

   답사를 다녀온 3월에는 융릉과 건릉을 잇는 지름길이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능을 순행하는 길이 더 길어졌다. 그만큼 생각도 길어졌다. 수원시와 화성시는 오랫동안 본인들 시의 브랜드로 ‘효의 도시’를 밀어왔다. 이때 효의 주체는 당연히 정조이다. 실제로 정조가 혜경궁에 무심했던 것도 아니며, 정조의 단명을 정조의 잘못이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54년 만에 일가가 재회했을 이 공간에서만큼은 부자가 조금 더 혜경궁을 위하기를 바란다. 묘역의 조성은 정조가 했을지라도, 융건릉은 혜경궁의 눈물을 먹고 자랐다. 그녀가 생전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정조와 사도세자만큼 혜경궁도 편히 잠들기를 바라며 융건릉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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