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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우칼럼] 갈 데까지 간다면
[219호] 2022년 03월 21일 (월) 익명 대학원생

   역사 사건을 인과관계 중심으로 서술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사건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역사가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면 이 주의점은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이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돌이켜 봤을 때 어떤 일은 중요해 보이고 어떤 일은 사소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모두가 소중한 나의 근본이라는 점. 그러니까 우리는 자각하기 어렵지만 대단히 느리게 무언가를 이루고 있는 중이 아닐까? 

   올해는 내가 2학년 때 새내기로 들어온 남자 후배들이 졸업하는 해였고 나는 그들을 위해 사진사를 자처했다. 그 애들은 자기들 선배인 나를 본인들 사진 찍는데 부리는 것에 미안한 감이 있던 눈치였지만 사실 이것은 전적으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졸업하는 후배들을 축하하는 것’만큼 딴짓을 하기 위해 허울 좋은 명분은 없으니까. 그렇게 모처럼 현실을 잊고 팔정도부터 백 주년 비, 대운동장과 정각원을 훑으며 후배들의 사진을 ‘기꺼이’ 찍어주던 찰나, 결국 한 후배의 말이 자명종처럼 나의 달콤한 현실도피를 깨웠다.

   “형도 그러면 내년에는 여기 있겠네요?” 나도 내년에, 아니 언제라도 여기에 서 있을 수 있을까. 물론 후배의 말을 듣고 각성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부에 매진하였다는 드라마 같은 일이야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조금의 위기의식은 주었다. 사실 아직 나는 나의 대학원 진학이 도피성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결국, 논문을 써야 졸업을 할 텐데 아직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 강도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동기와 후배가 임용시험에 합격하기 시작하며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조바심과 정체감이 재발했다.

   내가 소속했던 사범대학은 이름에서 예측되듯 졸업 후 진로가 명확하고 단일한 곳이다. 나 역시 남들처럼 임용시험 준비에 뛰어들었지만, 공부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은 확신뿐이었다. 이것은 내가 잘할 자신도 좋아할 자신도 없다는 확신. 그렇다고 교원 임용 환경이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나마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너가 공부를 좋아하면 그걸로 된 거지,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니?” 학교 선배이자 학부 때 수업을 들은 선생님은 내가 대학원 진로를 고민하자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용기를 얻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1년에 한 번 타인에 의해 나의 노력이 판가름 나는 임용시험보다야 대학원은 내 노력만큼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몫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기 시작하며 이겨냈다고 생각한 중압감, 남들에게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결과로 증명해 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결국 그 외부의 시선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한 나의 몫일 것이다. 사실 후배의 말도 응원에 가까웠지, 나에게 부담을 줄 의도는 조금도 없었으리라. 갈 데까지 간다면 가는 데까지는 가 있을 테고 거기가 내 자리일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어디를 가는지보다는 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걷다가 돌이켜 보면 무언가가 되어있는 자신이 보이는 날이 오지 않을까?

   빙하는 움직인다. 너무 천천히 움직여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움직인다. 움직임에 따라 거대한 흔적을 남기며 움직인다. 이렇게 글을 쓰더라도 분명 언젠가는 다시 시련에 빠지고 수없이 정체감을 느낄 터이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 사실이 나에게만 안 보이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고통이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일단은 갈 데까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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