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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으로 살아간다는 것] 빈 화면 앞에서 한참을 있었다
[218호] 2021년 11월 08일 (월) 최민정 대학원생

   석사 학기를 마치고 석박사통합 학기가 시작되었다. 문화콘텐츠·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간 학과. 이 길고 거창한 이름 어딘가에 배움의 자리가 있을까. 문화이론, 미학, 미술사, 영화, 영상콘텐츠, 게임, 도시 기획까지. 인문학을 기반으로 사회·문화적 현상인 무수한 이미지 재현물과 매체를 읽어내는 방식을 습득하는 과정은 길고 막막하기만 하다. 학제를 넘나드는 분야에서 그야말로 ‘쏟아지는’ 텍스트들을 소화해야 하는 압박. 게다가 전공 분야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 역시 병행해야 하는 날들을 겨우 따라가는 동안 다섯 번째 학기가 지나가고 있다.

   매 학기, 매 수업 생소한 이론가들의 학문적 성과에 감탄하는 것은 잠시일 뿐, 나의 글, 나의 연구에 대한 좌절감과 자괴감에 침잠하는 시간이 늘어 간다. 이렇게 석사를 마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둥둥 떠다닐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코스웍 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이 방대한 지식의 세계를 이어내는 나만의 키워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시시각각 나를 죄어들어 오는 글쓰기의 고통을 호소하자 지도교수님께서는 “이 시기는 너만의 칼을 가는 과정이야. 마음 없이 해.”라는 답을 주셨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무런 지표 없이 어딘가에 던져진 느낌, 끝없는 자기의심의 사슬은 나를 옥죄어온다. 과연 어디론가 나아가고는 있는 것일까? 답이 없는 질문에서 비롯된 우울의 바닥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하루하루 더해지는 무력감은 곧 죄책감으로 이어진다. ‘오늘도 한 문장도 쓰지 못했다니…’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는 일상의 죄책감을 애써 외면하는 하루를 보낸다. 문득 날씨가 좋아 산책을 하다가도, 불쑥 떠오르는 문장들로 엉킨 ‘시끄러운 뇌’의 상태가 휘발될까 급히 연구 공간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한 이론들. 나의 언어가 아닌 듯한 글들로 채워진 파편화된 글 뭉치들. 빈 여백이 잔뜩 남은 스크린 위에 깜빡이는 커서 앞에 앉아야 하는, 그보다 더한 두려움.

   코로나19가 장기화되고, 대학원 커뮤니티가 축소되며 소통이 줄어들자 이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간다. ‘4차 산업, 메타버스, 뉴 노멀 시대…’ 새로운 기술과 접목한 키워드들이 쇄도하는 세상에서 잠시 자리를 비우면 홀로 맥락을 잃은 채 헤매게 될까 하는 덧없는 걱정이 앞선다. 서둘러 최신 연구 과제들, 논문들을 연신 새로 고침 해 보지만, 이렇다 할 소득 없이 시간은 흘러간다. 키워드를 뽑아내고, 관련 논문을 쌓아두는 폴더의 개수만 늘어 가는 동안 사회적 어른으로 자리 잡아가는 친구들의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승진, 결혼, 출산.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면서도 그들의 생산력이 솟구치는 동안, 나는 점점 소진되어버려 사회적 유아에 멈춰버릴 것만 같다는 생각에 초조함이 더해진다.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대학원생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건 누구나 겪는 단계에요. 본인을 의심하지 마세요. 잘하고 있는 거야. 일단 지도교수를 모방하고. 지도교수의 사유 방법도 모방하고. 논리를 펼치는 방법도 모방하고. 문체도 모방했는데, 이게 정말 나중에 내 건지 네 건지 그 사람 건지 모르는 그 단계가 왔다. 너무나 당연한 거고요, 그때 스스로 의심하면 안 돼. (…) 그리고 이게 내 것이 된 건지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증명되게 되어있어. 의심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마세요. 대신에 본인이 그때 열심히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

   지도교수님의 위로를 수차례 꺼내 놓으며 이어지는 자기 의심의 연속, 그 지루한 소강상태를 견뎌내고 학회지 논문 두 편을 투고했다. 고통스러운 글쓰기로부터 해방된 기쁨도 잠시. 나는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수십 편의 논문을 띄워놓고, 책을 뒤적인다. 파편화되어 보이지 않던 이론가들의 문장이 나의 언어로 쌓이는 순간의 경험은 가끔 찾아오는 위안이다. 방대한 지식의 흐름이 조금씩 그 줄기를 내어 보이는 것일까.

   오늘도 나는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한 채 앉아 있다. 공허한 빈 스크린 앞에서 글이 되지 못한 글을 애도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소소한 동지애를 보내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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