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3.22 월 11:56
인기검색어 : 등록금 반환, 코로나19, 조교 문제
신문사소개 | 호수별 기사보기
> 뉴스 > 학술 서평 > 학술기획
     
[젠더비평]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
[215호] 2021년 03월 22일 (월) 박혜진 문학평론가

 

   
  △ 사진출처 : Pixabay  

모든 고통은 고유하다. 그러나 어떤 고통은 다른 고통보다 더 되돌릴 수 없다. 어떤 고통은 다른 고통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고통의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을 갖지 못한 인간은 법과 폭력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저마다의 고통을 인식하면서도 서로 다른 고통을 획일화하지 않는 법의 언어는 인간 역사의 자부심이자 인간성 그 자체다.


  ‘알페스’는 Real Person Slash(실제 인물 커플링)의 약자인 ‘RPS’를 한국식으로 읽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실존 인물을 사용해서 쓴 동성애 음란물 팬픽을 가리키는 말이다. 팬픽은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작품을 대상으로 팬들 스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를 주인공으로 재창작한 소설이다. 주된 소재는 멤버들 사이의 로맨스이며, 팬들은 오랫동안 팬픽을 통해 그들의 애정을 드러내고 향유해 왔다.


  알페스를 창작하고 소비하는 문화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있다. 한 남성 가수가 자신을 대상으로 한 팬픽에 느낀 모욕감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가 하면 팬픽이 남성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하는 또 다른 n번방에 필적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통을 호소하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외면하면 안 되는 것처럼 자신을 캐릭터로 창작된 이야기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목소리는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알페스의 창작론이 외면하고 있는 폭력성에 대해 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를 지적하기에 앞서 해결해야 할 두 가지 의혹이 있다.


  먼저, 갑자기 알페스 논의가 촉발된 맥락이다. 문제는 언제나 맥락과 함께 드러난다. 때로는 맥락이 문제의 전부일 때도 있다. 알페스는 남성들이 여성 아이돌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문제 제기에 대한 반박 개념으로 등장했다. 여성 아이돌이 요구받는 실질적 힘으로서의 성적 대상화 문제가 지닌 폭력을 팬들이 애정하는 방식에 기반한 놀이로서의 가상 스토리에 내재된 폭력에 비유하는 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미성년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 착취 영상을 촬영하고 공유하는 범죄와 아이돌을 좋아하는 팬이 멤버들을 커플링 해 연애 소설을 쓰는 데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동일한 무게로 취급하는 것은 법과 폭력의 개념을 발전시켜 온 인류 역사를 모욕하는 퇴행적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때의 두 고통을 비교하는 행위는 오히려 더 심각한 고통을 만들어 낸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성 착취의 폭력성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이어 픽션에 대한 몰이해의 문제가 있다. 슬래시 팬픽션은 ‘실존’ 인물을 포함하되, 남성과 남성의 로맨스를 다루는 팬픽션이다. 장르적 코드와 문법의 뚜렷함은 그것이 현실과 구분되는 상상적 놀이임을 드러내는 강력한 장치다. 따라서 알페스를 만들고 읽는 사람들에게 소설 속 관계와 묘사는 그 안에서 향유되는 코드일 뿐 상상의 언어는 현실의 벽을 넘지 않는다. 현실화할 수 없는 상상의 범위야말로 알페스의 정체성을 이루는 전부라 할 수 있다. 모든 폭력은 힘의 위계에서 비롯된다. 힘의 방향만 정확히 인식해도 알페스를 딥페이크나 n번방에 비유하는 행위에 깃든 저의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모든 고통은 고유하다. 그러나 어떤 고통은 다른 고통보다 더 불가역적이며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 동국대학원신문(http://www.dgugspres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페이스북 방문해 주세요!
더 많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육방송국 동국대학원신문 동대신문 동국포스트
동국대홈동국미디어컨텐츠 센터동대신문교육방송국동국포스트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4620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 1길 30 동국대학교 학술관 3층 대학원신문 | 전화 : 02-2260-8762 | 팩스 : 02-2260-8762
발행인 : 윤성이 | 편집인 : 변재덕 | 편집장 : 서신화 | 발행처 : 동국대학교 대학미디어센터 | 청소년보호책임자 : 변재덕
Copyright DGUGSPRES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gupress@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