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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멜을, 더 많은 짐멜을, 짐멜보다 더 많은 것을
새로나온 책 - 게오르그 짐멜, 게오르그 짐멜 선집, 도서출판 길, 2007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근대 세계관의 역사』,『예술가들이 주조한 근대와 현대』
[139호] 2007년 03월 05일 (월) 권두현 편집위원 편집위원

   
 
   
 
빛의 분산이나 굴절 등을 일으키기 위해 유리나 수정으로 만들어진 삼각 기둥 모양의 광학 장치. 바로 프리즘입니다. 프리즘. 이는 좬계몽의 변증법좭으로 유명한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또 다른 저서명이기도 합니다. 분명히 그러합니다. ‘분산’이나 ‘굴절’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아도르노를 거치게 됨으로써 우리 무심코 보아오던 익숙한 대상은 금세 낯선 정체성을 드러내고 마니까요.

이와 같은 프리즘은 비단 아도르노에게만이 아니라, 짐멜에게도 유효한 비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수많은 방법론을 자기에게로 집중시킨 뒤 이를 다시 독자들에게 발산합니다. 그러나 짐멜의 이와 같은 글쓰기를 당시의 학계는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학위를 취득하고 강사로 일하고 정교수가 되는 과정에서 짐멜은 번번이 실패를 경험했지요. 논문의 형식과 격식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날의 학계는 이제 짐멜의 글쓰기를 인정할 만큼 성숙했습니까.

짐멜은 일찍이 사물의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는 철학자들, 사람의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는 철학자들, 그리고 개념의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는 철학자들의 세 범주로 철학자들을 구분한 바 있습니다. 네 번째 부류는 문헌의 심장의 고동 소리밖에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죠. 짐멜은 이들을 ‘철학 교수’라 부르며 ‘철학자’와도 구분하였습니다. 우리 학계는 어떻습니까. 제 4의 범주에라도 포함되는지 성찰해볼 때입니다.

짐멜의 글쓰기를 인정할 것이냐 아니냐에 앞서 먼저 질문해야할 것은 왜 짐멜이 남들과 다른 글쓰기를 시도했냐는 것입니다. 짐멜의 글이 유추적일 수밖에 없는 데는 그가 실로 다양한 방법론을 이용해 짐멜 식의 고유한 글을 쓰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역사학, 예술사, 문학, 미학, 지성사, 그리고 철학(인식론, 형이상학, 사회철학, 역사철학, 문화철학, 예술철학, 생철학, 윤리학) 등이 짐멜의 저작으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코드입니다.

   
 
   
 
학문 간 경계 짓기에 몰두하던 20세기의 학계에서 이처럼 짐멜은 오히려 분과 학문의 경계를 횡단하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짐멜은 학계의 주변인으로 밀려났지만 역설적이게도 동일한 이유로 그는 세월이 흘렀어도 현실성을 지니는 학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코딩한 대상 역시 인간, 사회, 역사, 문화, 종교, 예술, 경제, 교육, 공간, 도시, 행위, 윤리, 인식, 의식, 감각 등 어느 한 군데 바로 놓이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 사회, 역사, 문화 등은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학문세계, 즉 대상의 상위에 놓이는 ‘범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 세계 및 학문 세계만의 관심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표준적 학자와 달리 짐멜은 공예품, 유행, 식사, 장신구, 친교, 연애, 대도시의 일상성 속에서 모더니티의 감수성을 읽어냈습니다. 이와 같이 복잡다단한 짐멜의 지식 체계는 ‘교회는 초월계를 세계에 이끌어 들이려는 것이며, 철학은 세계를 초월계에 이끌어 들이는 것’이라는 그의 한 마디 말로 압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플라톤 이래 서구의 지적 전통은 지식 자체가 단독적이며, 그로 인해 보편적인 본질적 존재성을 부여하려는 철학적 성격을 강화시켜 왔습니다. 이는 철학이 그 형이상학적 체계 내에서 존재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확연히 드러낸 인식 가능한 현전하는 대상에 부여해 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짐멜이 선택한 공예품이나 돈과 같은 대상은 서구의 기존 지적 전통 하에서 형이상학적 체계에 속할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아마도 그의 논문이 인정받을 수 없었던 데는 논문의 형식 외에도 이와 같은 내용적 문제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형이상은 이미 그 말 속에 형이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가로 놓인 공예품이나 돈과 같은 입구를 통해 우리는 근대의 미로를 걷게 됩니다. 미로를 통해 펼쳐지는 시공간이 바로 짐멜과 ‘우리들의’ 근대인 셈입니다. 그 공간들은 비동시적이면서 동시적입니다. 이를 발견하는 순간 우리는 보들레르나 루소와 마찬가지로 우울한 도시의 고독한 산책자가 되지요. 하지만 그것이 엘리트주의나 댄디즘과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짐멜은 연구 대상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볼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독자와 함께 들여다보고자 하는 세상은 희극적이기도, 비극적이기도 합니다. 아도르노나 벤야민와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식의 우울함이나 계몽주의자들의 밝음, 이 사이를 줄타기하는 듯한 곡예적 글쓰기를 하지요. 에세이 형식의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짐멜은 관념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구체적 대상을 관념적으로 표현하지요. 한 가지 명확한 이론을 근거로 한 단언이 없어 애매하지만, 짐멜의 글은 따뜻합니다. 짐멜에 대한 그 어떤 단언도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단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짐멜은 이론가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궁극적인 최고의 객관적 가치는 이를 주장할 수 있을 뿐, 논증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프리즘보다는 빛이 그에게 더욱 유효한 비유일지도 모릅니다. 그 자체로 주목받는 대상으로서의 빛이 아니라, 대상에게 투사고 반사되어 그 대상의 색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그런 빛 말입니다. 혹시 이것이 아도르노가 비판했던 ‘도구적 이성’일까요. 짐멜 식의 도구적 이성은 이성 그 자체가 대상이자 목적이 되는 자기 회귀적 이성입니다.

자기 회귀적 이성은 근대, 그리고 현대를 구성하는 다양한 의미 세계를 조화롭게 연결시킵니다. 따라서 이를 표현하는 방법 역시 다양한 방법론의 공존과 병존일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가 짐멜을 읽는 이유는 그의 파롤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와 같은 공존과 병존으로 중첩된 랑그의 비가시적 그물망을 자유롭게 미끄러져 다님을 발견하기 위함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하는 주관문화와 객관문화를 아우르는 ‘문화’에서도 이러한 미끄러짐은 명백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미끄러짐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면,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은 순전히 우리 독자들의 몫일 터입니다.

권두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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