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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LASSIC -거대한 농담의 심연
-밀란 쿤데라의 『농담』
[135호] 2006년 09월 04일 (월) 허병식 문학평론가

거대한 농담의 심연

조운 콥젝의 표현대로 과대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한 작품들이 있기 마련이다. 루시디의 표현대로 그것이 지닌 예리한 통찰력과 지혜와 희극성을 올바르게 판단하기가 불가능한 책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도록 만들어주는 바로 그러한 책들이며, 소설을 읽는다는 기이한 관습이 인류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읽혀야 할 우리들의 자산이 되는 책들이다. 그리고 그 책들 중 가장 먼저 호명되어야 할 작품으로 밀란 쿤데라의 첫 장편인 『농담』을 드는 것은 전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1965년에 처음 출판된 『농담』은 주인공 루드빅이 15년 만에 자신의 고향인 모라비아로 귀향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고향으로의 귀환이라는 이야기가 불러오는 통상적인 기대와는 달리 루드빅은 자신의 고향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단지 그 귀향의 목표가 ‘아름다운 파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파괴를 수행할 장소로 고향의 도시를 선택한 것은 단지 그 행위가 추잡하고 저속한 일이기 때문이란 것이 루드빅의 고백의 내용이다. 과거의 원한과 파괴를 향한 충동이 귀속감을 부여해주지 못하는 고향이란 장소에서 얽혀들며 전개되는 『농담』의 이야기는, 소설을 네 등장인물이 각기 다른 장의 화자가 되어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도록 만들고 있다.

2장과 7장의 화자로 등장하는 헬레나는 자신의 정부인 루드빅을 만나기 위해 모라비아로 향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하나로 온전히 남아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자신에게로 돌려보낼 수 있는 사랑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루드빅을 파멸하게 만들었던 제마넥의 부인으로, 루드빅은 자신이 말한 바로 그 아름다운 파괴의 희생자로 그녀를 선택했을 뿐이다. 4장과 7장의 화자인 야로슬라브는 루드빅의 오랜 고향 친구이며, 루드빅과는 달리 고향을 떠나지 않고 모라비아에서 살고 있다.

그는 고향의 민속 축제인 <왕들의 기마 행렬>의 주재자이고, 민속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놓고 자신의 어린 아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6장의 화자인 코스티카는 루드빅과 같은 대학의 학생이었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생의 파멸에 동의하며 모두의 손이 일제히 올라가던 경험을 겪어야만 했던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는 루드빅과는 달리 그러한 경험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음의 힘으로 극복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또한 그 믿음이란 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살아나는 욕망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회의하고 있다.

그리고 루드빅은 1장과 3장, 5장과 7장에서 화자로 등장하여 그의 대학시절의 친구였으나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원한을 안겨준 존재인 제마넥을 향한 복수의 은밀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그 원한의 내용이란 이런 것이다. “바보 같은 농담이나 즐기는 치명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루드빅은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여자”인 마르케타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공산주의 건설을 향한 그녀의 건조한 태도 속에서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기 위해 그녀에게 엽서를 보내게 된다.

 그 엽서에 쓰여 있던 네 문장,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빅.”이란 문장들로 인해 루드빅은 당의 학생위원회로부터 소환되고 ‘낙관주의’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추궁을 받게 된다. 그리고 학생위원장인 제마넥은 루드빅을 당으로부터 축출하고 학업의 지속도 금지시킨다는 결정을 내린다.

자신의 파멸을 결정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동료들의 이념과 열정에 대해서, 루드빅은 군대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겪어야 했던 한 나이 어린 장교의 행위를 조롱하듯 빗대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젊음이란 참혹한 것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희랍 비극 배우의 장화에 다양한 무대 의상 차림을 하고,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면서 광적으로 신봉하는 대사들을 외워서 읊으며 누비고 다니는 그런 무대이다. 역사 또한, 미숙한 이들에게 너무도 자주 놀이터가 되어주는 이 역사 또한 끔찍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은 역사의 지속성과 민족적 가치의 소중함을 믿는 어떤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도록 만든다. “수세기 전부터 모라비아 마을들에서는 꼭 오늘처럼 소년들이 이상한 메시지를 지닌 채 말을 타고 길을 떠나, 자신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 낯선 방언으로 씌어진 말들을 감동적일 만큼 충실하게 읊어내곤 한다. (……) 그들의 메시지는 해독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무대에서 연기를 수행하며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관습이나 언어나 민속행사에 여전히 의미 있는 감동의 메시지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농담』 바깥의 현실에서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원에 대한 믿음이 집단의 억압적인 목소리 속으로 종종 묻혀버리는 사회에서라면, 그러한 인물들의 행위는 더욱 부각될 것이다.

자신의 신념이 다른 사람의 파멸을 추인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고향이나 민속 같은 ‘소중한’ 가치를 지닌 것들이 종종 발명되거나 날조된 것들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라면, 이 작품은 그저 재미없는 하나의 ‘농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기에 『농담』이 지닌 의미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20세기를 지배했던 전체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20세기의 가장 의미 있는 문학적 경향이었던 모더니즘의 적통을 이어받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농담』은 지난 세기를 대표하는 문학으로 손색이 없다. 사랑을 둘러싼 오해와 배반에 대해서, 젊음의 미숙한 열정과 역사의 폭력에 대해서, 신에 대한 믿음과 회의와 관용에 대해서, 그리고 고향이나 민속이란 오래된 유산과 그것의 역겨움에 대해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의 작품을 통해서 이토록 섬세한 통찰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하리란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쿤데라는 오늘날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작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모더니스트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농담』의 작가인 것으로도 모자라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불멸』을 쓰기까지 한 밀란 쿤데라에게 아직 노벨문학상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로 믿기 어려운 ‘농담’이다. 그것은 노벨상위원회의 게으름과 안목없음을 증명하고, 노벨상의 수치를 한해 한해 연장해 가는 일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덧붙여 말하자면 시대와 정권의 변동에 따라서 끊임없이 자신의 시적 경향을 다르게 꾸며왔던 동양의 한 시인에게 노벨상이 주어질 지도 모른다는 풍문이 떠도는 일이 증명하는 유일한 사실은, 노벨문학상이 드디어 자기파괴의 어처구니 없는 욕망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는 것이다.)

『농담』의 결말은 이 작품을 하나의 거대한 ‘농담’으로 완성하는 뛰어난 희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미쳐 소개하지 않은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사랑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괴물처럼 증식해가는 고약한 농담’인 이 이야기를 지워버리고 싶어하고 그것으로부터 떠나고 싶어 하는 제마넥이, 사람과 사물과 행위와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이 영속적이라는 믿음과 행위와 실수와 잘못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헛된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바로 그 제마넥이,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불가능한 농담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자아라는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되는 거대한 드라마가 이 작품에 담겨져 있다는 점이 『농담』을 진정한 걸작으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헐리우드가 생산해낸 어떤 이야기들 보다 더 유쾌하고 지적인 재미와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할 것이다.

언젠가 쿤데라는 소설의 죽음을 운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설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 이러한 말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이 쿤데라 자신에게, 그리고 『농담』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허병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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