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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을의 민주주의와 진보정치의 과제
[214호] 2020년 11월 09일 (월)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 사진출처 : Pixabay  

   진보정치가 마르크스주의와 동의어일 때가 있었다. 자본주의적 착취, 사회주의 혁명, 노동자 계급 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같은 개념들이 진보정치의 모든 것을 요약하던 때가 있었다. 정치는 혁명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고, 주체는 노동자 계급과 다른 어떤 것일 수 없었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은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말고는 달리 사고 될 수 없었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이 마르크스주의를 물질적으로 해체했다면, 그와 동시에 국내에 수입된 ‘포스트 담론’(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등)은 마르크스주의를 인식론적으로 탈구축했다. 포스트 담론 이후,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거대 서사는 선형적 목적론의 대명사가 되었고, 정치의 보편적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생각은 본질주의의 전형으로 비판받았다. 또한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강조는 경제주의적 관점으로 기각되었다. 이러한 비판을 ‘포스트모던 이데올로기’라고 반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러한 비판 내지 탈구축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오늘날 진보정치를 더는 마르크스주의 정치와 동일시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은 진보정치의 과제가 자본주의적 착취의 폐지,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로의 이행, 프롤레타리아 주체를 중심으로 한 민중적 주체의 구성과 동일시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것은 진보정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마이너스와 플러스의 관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진보정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마이너스된 무엇이다. 우선 자본주의적 착취와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더는 진보정치의 첫 번째 과제일 수 없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개념 자체가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그 내재적 위험성에 대해 말하는 것, 따라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사고하는 것은 더는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의 고유한 영역이 아니다. ‘포스트 캐피탈리즘’은 세계적인 자본가들, 글로벌 기업 총수들의 주요 관심사이자 경영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더 많은 불신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만큼 자본주의 비판은 더 불투명하고 복잡해졌다.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명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더는 자본주의, 더 정확히 말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자본주의보다 더 나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4차산업혁명’은 그것에 대한 불길한 징조다.

   따라서 오늘날의 진보정치는 자본주의에 대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추상적 비판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문제는 대안에 대한 대안들을 사고하는 것이다.

   둘째, 따라서 진보정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플러스 된 어떤 것이다. 대안에 대한 대안들을 사고해야 하는 이유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다양한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자본주의 비판으로 한정될 수 없는 또 다른 근본 과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선진국’ 남성 정규직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제기될 수도 있으며, ‘개발도상국’에서 저임금노동에 종사하는 일용직 여성 노동자들, 아동 노동자들의 관점에서도 제기될 수 있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적 착취 자체보다 자본주의적 착취에서 배제되는 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착취에서의 배제는 생존 불가능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적 평등과 차이의 문제, 인종 차별 및 장애의 문제는 자본주의적 비판으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진보정치의 과제는 더는 단일할 수 없으며, 가치의 위계질서에 따라 배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진보정치는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비판에 더하여 가부장제적인 권력의 해체, 인종주의 및 국민주의의 변혁, 정상-비정상의 규범적 구조의 해체와 같은 주제들을 사고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은 진보정치가 연대의 새로운 형식, 연대적 주체성의 새로운 양식을 탐색하고 실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연대는 노동자계급을 중심에 둔 연대로 사고 되었으며, 1단계로 혁명을 통해 권력을 쟁취한 뒤, 그다음 권력을 기반으로 정의로운 목적을 추구하는 것으로 사고 되었다. 그렇다면 연대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도구적 연대였던 것이다. 역사가 말해주듯 이것은 늘 진보정치 내에서, ‘대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갑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한 을의 희생을 요구했던 연대였다.

   반대로 이러한 도구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사회를 변혁하고 권력 관계를 개조한다는 것은, 지금 당장 을의 민주주의를 각각의 영역에서, 조직에서, 실천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국가를 통한, 국가 속에서의 민주주의보다는 국가 바깥의, 국가에 맞선, 국가와 무관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지배자들의 이익을 위한 정치 조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을의 민주주의로서의 진보정치가 국가 안에서의 민주화, 제도의 민주주의적 개조를 외면할 수 없다. 이러한 과제를 외면하고 직접 민주주의, 광장의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스스로를 무력화하는 것으로 귀착되기 마련이다. ‘을들의 관점’에서 최대한의 민주화, 최대한의 제도적인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가능한 다양한 방식으로 을들 사이의 연대와 결속을 맺어야 한다.

   둘째, 을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세력이 사고하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더 보편적인 쟁점을 제기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조직, 실천, 삶에서 스스로 실험할 줄 알아야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단체들 가운데서 을의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걸맞은 조직의 형태, 실천을 구현하고 있는 조직이 존재할까? 을들의 연대가, 을들의 조직이, 크든 작든 간에 스스로 민주주의의 실험장이 될 때, 아마도 을의 민주주의는 좀 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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