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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산책] 코로나19 사태와 인종주의
‘인종’이라는 낙인에 관해
[211호] 2020년 04월 13일 (월)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사진출처 : Pixabay  

   일상이 잠식되고 있다. 2020년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뒤늦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병’(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을 선언했다. 1968년 홍콩독감과 2009년 신종플루에 이어 사상 세 번째다. 매일 뉴스를 보기 전에 깊게 심호흡을 해야 한다. 설마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감염병은 인류 역사와 함께 존재해 왔다. 로마제국 멸망과 중세사회 해체는 페스트로 인한 인구 감소가 원인이었고, 콜럼버스의 신대륙 도착은 아메리카인에게 치명적인 매독 같은 질병을 전파했다. 가깝게는 1918년 스페인독감으로 5천만~1억 명이 사망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19를 스페인독감 이후 가장 전파력이 강한 바이러스로 본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해 아시아로 퍼진 바이러스는 이제 유럽과 미국에서 맹렬한 속도로 퍼지고 있다. 의료진과 방역 당국의 사력을 다하는 노력에도 감염병 대유행은 막을 길이 없다. 과거에도 감염병은 무역로를 따라 이동했다. 하물며 지구화된 오늘날에야 바이러스에 국경이 없는 건 당연하다.

   전 세계에서 자발적·비자발적 자가격리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e)를 권고했던 WHO는 3월 22일 뒤늦게 사회적 연결과 연대를 놓치지 않는 물리적 거리두기(physical distance)로 부르자고 정정했다. 집 밖으로 못 나오게 하니 새삼 산책과 조깅이 하고 싶어지고, 이웃과 못 만나게 하니 시끄럽고 성가신 위층 사람이 갑자기 사랑스러워지기라도 하는 걸까.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회적 스킨십(social skinship)을 고프게 했다. 인간에게 사회적 관계는 의식주만큼이나 중요했다. 봉쇄된 우한에서 주민들은 아파트 베란다로 나와 춤을 추며 서로를 위로했다. 밀라노, 로마, 파리, 취리히에서는 발코니에서 ‘벨라 차오’ 노래가 울려 퍼졌다. 독일에서는 매일 정오에 의료진에게 감사 인사를 외치고 있다. 노래와 구호는 ‘코로나19 감염돼도 너를 버리지 않아’라는 공동체 연대의 다른 표현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사태는 너무 심각하다. 덮였던 눈이 녹고 더러운 쓰레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세계 곳곳 어디든 예외없이 그 사회가 치부가 드러나고 있다. 예산 삭감으로 공공의료가 위태로웠던 이탈리아는 연일 최고 사망자 숫자를 갱신하는 중이다. 공공의료보험이 없는 미국은 확진자가 가파르게 늘고 있다. 한국(지난 3월 28일 기준)은 확진자와 완치자의 골든크로스, 즉 완치자가 확진자 수를 넘었지만 여전히 지역사회 감염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두 달여 동안 한국사회의 치부는 아프게 드러났다. 코로나19로 인해 첫 사망자가 나온 대남청도병원은 폐쇄정신병원이었다. 수천 명의 신천지교도 감염 사태는 이단 종교를 키워온 한국사회의 문제를 드러냈다. 그 다음엔 콜센터 여성 노동자들의 집단감염이 이어졌다. 폭증하는 배달 수요 때문에 과로에 시달리던 쿠팡맨은 목숨을 잃었다. 자가격리해도 먹고사는데 지장없는 정규직 노동자와 당장 일자리가 사라진 비정규직 노동자는 처지가 달랐다. 코로나19는 가장 낮은 곳부터, 가장 소외된 곳부터 잠식해 들어갔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안 가리고 평등하게 감염되지만, 감염의 여파는 사회계급 간 차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사회의 ‘공식’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국민’도 이럴진대, ‘이주민’은 어떨까? 지난 3월 20일 이주민단체가 연 ‘코로나19가 드러난 인종차별의 민낯 증언대회’에서 발표된 내용을 보면, 외국인을 감염원으로 보는 편견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은 한국에서 산 지 몇 년이나 됐지만 한 유명 스파에 출입을 거부당했다. 경기도 여주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는 2개월째 공장에서 나가지도 못하게 했단다. 중국인 밀집거주지역 대림동에는 한국 전체 확진자가 7천 명을 넘도록 한 명도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는데도 “위험하다, 일부러 검사를 받지 않은 것 아니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주민이 공적 마스크 구매에 어려움을 겪는 것도 문제다. 외국인 이주민은 건강보험증과 외국인등록증을 함께 제시해야 하는데, 두 증서가 없으며 구매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5개월 미만 체류 이주민, 유학생, 사업자 등록 없는 사업주 등 수십만 명이 광범위하게 차별을 당하는 것이다. 더구나 농어촌 지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에게 마스크는 사치다. 비닐하우스에서 독한 농약을 쳐야 하는 농촌 이주노동자에게 마스크 구하기가 힘든 건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이래서야 조선인학교에 마스크 지급 누락으로 논란됐던 일본 사이타마시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감염병 방역이 가르쳐 주는 지혜는 가장 차별받는 곳, 가장 낮은 곳부터 방역해야 모두가 안전하다. 가장 힘없는 사람부터 챙기지 않으면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것이 공중보건 역사가 알려주는 교훈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세계 각지에서 인종차별을 촉발하고 공고히 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유럽과 미국에서 아시아인이, 아시아에서 중국인이 차별당하고 있다. 코로나19 발생지와 가깝다는 이유로. 인종주의란 무엇인가?

   인종주의란 타자의 행위가 아니라 속성에 근거해 그를 분류하고, 측정하고, 가치를 매기고, 증오하고, 심지어 말살해온 서양 근대의 이데올로기이다. 쉽게 말하면 서양이 다른 세계를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분류하고 우열을 매기고 차별하는 근거가 되어 온 원리가 인종주의이다. 인종주의의 핵심은 겉으로 보이는 여러 특징으로 내면을 상상한다. 나와 너, 주체와 타자의 차이를 피부색, 두개골, 골격 같은 생물학적 속성으로 환원시켜 인종화된 타자의 몸에 대한 온갖 담론을 생성하는 데 인종주의의 핵심이 있다. 눈에 보이는 ‘외모’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혈통’과 ‘지성’을 상상하고 우열을 매기는 데서 인종주의는 출발했다. 낙인찍히고 배제당한 ‘인종화된 몸’의 탄생이 인종주의의 역사였다.

   낙인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노예무역과 노예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한 노예제 폐지 이후에는 흑백 분리를 명분으로 흑인이 낙인찍힌 몸이 됐다.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은 아프리카 각지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강제 이주당한 이주민들이었다. 국가 없이 떠돌던 유대인은 영원한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도래하고 근대 국가 체제가 굳건해지면서 유대인은 종교적 타자가 아니라 인종적 타자로 발명되었고 개종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생물학적 운명이 되었다.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라는 부당한 오명을 쓰고 있다. 아시아인은 오랫동안 오리엔탈리즘의 희생자였고, 산업화와 고도 경제성장 이후에는 질투과 멸시라는 양가적 감정 표출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 대량 이주와 난민이 발생하면서 이주민과 난민은 비국적자 비국민으로 분류되어 차별을 겪었다. 흑인, 유대인, 무슬림, 아시아인, 이주민, 난민은 모두 인종화된 몸을 갖게 된 소수자의 이름이다.

   한국은 많은 검사를 통해 선제적으로 확진자를 찾아내는 방역으로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통제에 성공하고 있다. 3월 초 외교부와 법무부는 국적이나 체류 자격과 무관하게 외국인들이 전국 124개 보건소와 46개 민간 의료기관에서 무료로 코로나19 검사를 받게 한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또한 확진 여부를 검사할 때도 미등록 체류자로 신고되지 않도록 했고 이를 이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국적이나 체류 자격으로 보건 서비스를 차등적으로 제공할 경우 바이러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 코로나19 사태 대응으로 국제사회에서 널리 호평받을 만한 정책이었다. 이는 주목할 만한 선례다. 바이러스 감염에 국적과 인종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방역 차원에서는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것이다. 재난상황에서 도입한는 정책을 비(非)재난상황으로 확대할 수는 없을까?

   나오미 클라인은 『쇼크 독트린』에서 지진, 쓰나미, 홍수 같은 자연재해 이후 자본주의는 비상사태를 활용해 고삐풀린 폭주를 계속한다고 비판했다. 코로나19 사태 역시 자연재해이고 비상사태다. 역발상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인종주의를 지탱하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과 강박은 인간존재의 섞임과 얽힘으로 인해 결코 달성될 수 없는 요구일 뿐이다. 인종주의는 내파(內破)하는 계기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비상사태는 바이러스 앞에 인간 공동체의 운명은 하나라는 것을 일깨워 줌으로써 인종주의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위기는 기회다. 아니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진부한 문구를 꺼내는 이유는 이것 말고는 길이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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