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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해야지
[211호] 2020년 04월 13일 (월) 익명 대학원생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이어온 학원 강사가 대학원 진학을 앞둔 나에게 해 주었던 이야기가 아직도 또렷이 생각난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절대 직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가치에 상응하는 다른 무언가를 내놓아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대가는 좋아하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이 궁극적인 삶의 행복이라 믿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무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매료된 후 줄곧 연극을 업으로 삼으리라 다짐했던 나도 그러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객석에서, 또 때로는 무대 뒤편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오랜 시간 사랑해 온 연극에 기여할 수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일이었다. 학원 강사의 이야기가 나에게만큼은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이유는 이렇듯 연극에 대한 내 애정의 크기와 굳건함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나큰 애정만으로 대학원 생활을 이어나가기가 녹록치 않음을 절감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공 분야에 대한 애정은 대학원 진학의 동기일뿐 그 자체가 될 수 없었다. 내가 연극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리고 좋은 연극이 이 사회에 끼칠 영향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는 학교 사람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사안이었다. 대학원생으로서 연극에 대한 나의 애정과 관심사는 결국 수업 시간의 발제문, 최종적으로는 논문을 통해 드러나야 했고, 학부시절 연극을 전공하지 않은 나의 용어는 적확함의 언저리를 맴돌 뿐이었다. 연극계의 폐쇄성을 지적하자 “왜 많은 사람들이 연극을 봐야하냐”고 되묻는 교수 앞에서 나는 차마 “좋은 연극 한 편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믿기 때문이라”는 아둔하고 초라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소외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힌 나는 그렇게 점차 대학원 생활에 염증을 느껴만 갔다.

   대학원 생활에 대한 염증은 연극에 대한 애정 전반으로까지 번지기 시작했다. 우선 봐야할 연극 편수가 늘어난 탓에 티켓 값을 마련하기에 벅찼고, 그렇게 힘들게 티켓 값을 마련해 연극을 볼 때면 비평문에 쓸 문장들을 떠올리느라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다른 세상에 온전히 마음을 쏟지 못했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무대장치가 만들어 내는 분주함은 더 이상 나에게 어떤 즐거움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연극 관람은 연극을 공부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하나의 의무이자 업무에 가까운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 학원 강사의 말처럼,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선 다른 소중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민낯을 피부로 느끼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1년에 100편이 넘는 공연을 보고, 수업을 듣고, 이론서를 탐독한다. 그 과정 속에서 그저 더 이상 연극에 대한 애정, 그리고 좋은 연극이 이 사회에 끼칠 건전한 영향력에 대한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몇 해 전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각색한 공연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냥 해야지, 일을 하자.” ‘시대비평’이란 자신이 몸담았던 문학 계간지의 폐간, 이 시대를 바라보는 자신들의 시선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음을 목도한 그가, 택할 수 있는 일이란 그래도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 뿐이었다. 그러니 나도 우선 당분간은 이렇게 밖에 말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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