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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 …을 보다
비밀스런 햇빛이 내리 쬐는 비루한 땅바닥의 천명
[142호] 2007년 06월 04일 (월) 박우성 영화학과 석사과정

   
 
   
 
인간이라는 존재를 비극의 극단에 몰아놓고는 다만 관조의 시선만을 던지는 저 비정한 이미지들의 나열을, 게다가 그 어떤 처방전도 내려주지 않은 채 상처투성이의 몸뚱이로 어떻게든 살아가길 강권하는 이 가학적인 언사를, 과연 우리는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죽은 남편의 고향 ‘밀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신애(전도연)라는 여인이 남편의 고향 바로 그곳에서 어린 아들마저 잃어버리고 급기야 미쳐버린다는 내용의 영화 <밀양>(이창동, 2007)은 비극의 극단에서 삶을 감내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한 여인에 관한 가혹하고도 처절한 기록이다.

왜 하필이면 ‘밀양’이었을까? 영화가 ‘밀양’을 찾아가는 국도에서 시작한다는 점만으로도 그곳이 차지하는 의미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신애의 말대로 그곳이 죽은 남편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아니면 그곳이 죽기 전 남편이 그토록 살기를 갈망했던 땅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영화 <밀양>에는 남편을 복원하는 그 어떤 방식(플래시백)도, 나아가 남편과 관련된 단 한 컷의 이미지(가령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죽은 남편을 기억하며 그와의 추억을 더듬어 본다든가, 남편이 성장기를 관통했을만한 골목길을 완상(玩賞)하는 따위의 낭만을 단 한마디도 기술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황은 정반대이다. 남편의 고향에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진지 오래라는 비정함 혹은 매정함! 말하자면 더 이상 죽은 남편 따위에 집착하며 슬퍼할 여유가 없으며 그렇기에 그 곳이 남편의 고향일지라도 전혀 상관없다는 도도함! 서울에서 찾아온 신애의 남동생이 말한다.

“누나, 매형은 바람까지 피웠잖아.” 일말의 남편-이미지도 없다는 것, 게다가 죽기 전에 신애가 아닌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까지 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죽은 남편은 추억의 실타래가 아니라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폐기되어야만 했던 대상이 아니었겠는가.

사실로 치자면 ‘밀양’은 신애와는 전혀 상관없는 공간이다. 신애 스스로 그곳을 전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그곳에는 전무한 까닭이다. 때문에 신애에게 ‘밀양’은 남편을 포함한 모든 과거를 당당하게 거세시키고 ‘뭔가’ 비밀스런 재생이 이루어질 것 같은 매혹적인 공간(‘密陽’이 비밀스런 햇빛임을 상기하라)이며, 그리하여 죽은 사람에 대한 집착 따위는 기각(棄却)하고 살아남은 자는 어떻게든 ‘삶을 지속시켜야 한다!’는 지상명령이 수행되는 ‘타자의 공간’으로 거듭나기에 충분하다. ‘밀양’은 도대체 어떤 곳이냐는 신애의 질문에 종찬(송강호)은 대답한다. “뭐 딴 곳과 특별히 다를 게 있겠십니꺼.”

그러나 기존의 이창동 영화에서도 숱하게 설파되었듯 과거를 끊어버리고 현재를 살아간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희망으로 보였던 어린 아들마저 어처구니없는 유괴사건으로 스러져버리지 않던가. 싸늘히 식은 아들의 주검을 마주한 어미의 심정을 냉정하리만치 멀리서 다만 관조할 뿐인 비장한 카메라의 시선을 보라! 그러나 냉정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한 번 따져보자. 신애에게 던져진 비극의 근원은 무엇인가? 남편도 잃은 판에 아들마저 죽어버렸기 때문에?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신애는 그토록 슬픈 것인가? 매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신애는 비극은 죽은 아들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그녀의 가슴을 조여 오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고통, 그러니까 아들을 따라 죽지 못하고 ‘그럼에도’ 처절히 삶을 감내해야만 하는 ‘산 자’의 몸부림 그것 자체다. ‘여전히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처참한 지상명령 바로 그것이 신애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다. 과일을 깎던 칼로 손목을 긋고는 스스로 깜짝 놀란 신애가 약국 주인부부를 향해 외친다. “살려주세요!”

남편이 죽은 후 선택한 곳이 ‘밀양’이라는 땅이었다면, 아들이 잃은 후 찾아간 곳은 ‘교회’이다.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오라는 집사의 강권에도 냉소를 짓던 그녀가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에 들어가면서 돌연 ‘깨달음’을 얻는다. 물론 그녀의 깨달음이 진정의 발로(發露)인지는 의심스럽지만, 겉으로 보기에 어찌했든 그녀가 촉망받는 ‘신인 신도’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처절한 지상명령을 어떻게든 수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선택할 수 최후의 수단은 이성적 사유와의 결별뿐이란 말인가. 이제부터 신애가 감내해야 할 삶은 하나님의 드높은 은총과 함께 비극적 과거를 청산하고 초월적 세계를 꿈꾸는 것, 그리하여 아들을 살해한 범인마저도 신의 도움으로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용서를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용서가 더 이상 무용해져버리는 기묘한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만 하는가. 살인범에 대한 여전한 증오심 때문에 용서가 무용하다는 말이 아니다. 왜 그를 용서할 수 없는가. 그것은, 용서받아야할 살인범이, 신애에게 용서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은총을 받아버렸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하나님께서 범인에게, 신애의 허락도 없이 감히, 신애만이 베풀 수 있는 용서의 미덕을, 이미 베풀어버리신 것이다. 하나님에게 새치기 당한 신애가 단단한 시멘트 바닥 위에 돌연 쓰러진다. 희멀겋게 뒤집어진 눈을 한 채. 그리고 하나님께 복수(?)하기 위해 한창 설교로 달아오른 연단에 잠입하고는 이런 가사의 노래를 튼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이제 신애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남편도, 아들도, 그토록 의지하고 싶었던 하나님도, 그녀의 편이 아니다. 그런 의문의 순간에, 최근 여러 잡지에서 숱하게 회자되는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다. 비밀스런 햇빛이 조심스럽게 와 닿는 비루하기 짝이 없는 땅바닥의 이미지. 상처받는 몸뚱이에게 내려진 최초이자 최후의 처방전인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 역시 결코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없다. 밟고 있는 것이 비루한 땅바닥일지라도 어쨌든 우리가 그것을 밝고 살아가는 한, 그러나 바로 그 비루한 땅바닥에 여전히 ‘비밀스런 햇빛’이 내리쬐는 한, 우리는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천명(闡明)! 어떻게 이토록 지독할 수 있을까?

박우성 (영화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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