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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횡단
[209호] 2019년 09월 23일 (월) 유계영 시인
   
  △ 사진출처 : pixabay  

1.

실제의 횡단보도 앞에 서 있지. 실제의 구청에 가기 위해서다. 실제의 수요일이고 실제의 한낮이다. 나는 이 사람들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평일 한낮의 사람들. 가상의 수요일과 가상의 한낮, 가상의 사람들. 대부분은 일터나 학교에, 테이블에 놓인 탁상시계처럼 째깍거리며 하나같이 째깍거리면서…… 내가 예상치 못한 일로 주민등록 초본을 떼러 가듯이, 예상치 못한 이 자들도 증명하러 가는 길이지. 자신의 째깍거림을 스스로 중단할 수 있음을. 자랑스러운 팔과 다리를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음을. 기어코 해내고 맘을. 월요일일지라도.

 

한 남자가 다가와. 종이쪽지를 손에 쥐고서. 돌연 내 앞에 멈춰 섰는데, 쪽지에 적힌 것을 읽으려다 고개를 들더니, 나를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잖아. 못 볼 거 봤다는 듯이. 하마터면 큰 실수했겠다는 듯이. 그 남자 가까운 거리의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는다. 병원의 위치를 묻는다. 나는 방금 전 벌어진 일에 대해 그 어떤 동요도 없이 ‘이 길로 곧장 가면 보일 거예요’ 하고 마음속으로, 마음속으로 꽝꽝 대답한다. 곧장 가면 병원, 실제의 병원이 있다고.

 

맞아. 꺼져줘, 하는 표정에 일가견 있거든. 이쪽 가능성이 농후하긴 하지. 습관이 그래. 별 거 아니네. 신호 되게 기네.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보행신호 기다리고 있어. 한 남자 사라지고. 온데간데없고.

 

2.

나일론 장바구니를 든 질문이 나를 바라보며 다가오는 것이다. 질문은 무슨 말이든 하려고 안달난 입모양이다. 아무나 붙잡고 반갑다느니 날씨가 좋다느니 그런 얘긴 됐어요. 나는 질문이 바짝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저 이 동네에서만 삼십 년 살았어요. 어디 간다고요?

그러나 질문은 보기 좋게 나를 피해간다. 소화전이나 주차고깔을 피하는 정도의 예사로운 몸짓으로. 질문은 가까운 거리의 사람에게 은행을 묻고 있다. 그거라면 내가 대답할 수 있는데. 수수료 물지 않게 해줄 수도 있는데. 무엇이 나를 사람 아닌 것으로 보이게 하는 것인가 꼼꼼히 따져보았지만 흐르는 째깍째각…… 맹렬히 흐르는…… 도대체 이 소리는 어디에서

 

길 찾으시죠? 제가 이 동네에서만 삼십 년째 삽니다.

질문의 눈빛이 분명, 반갑다고, 오늘 날씨 참 좋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3.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시작한 이 이야기가 매우 시시껄렁하다면

이야기가 가진 진실성 때문입니다.

 

신호등은 왜 바뀌지 않지?

삼십 년 동안 서 있었는데

 

4.

기차 말인데. 자동차나 오토바이도 상관없긴 하지. 그래도 기차가 좋겠어. 평등한 편이니까.

기차의 꽁무니를 따라 전속력으로 뛰는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죽을힘을 다해 뛰잖아. 멀어지는 걸 끝까지 보잖아. 나는 가상의 나를 보냈지. 병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남자, 은행이 있는 곳으로 사라진 여자, 따라가 보라고. 왜인지 그들은 병원으로, 은행으로 가지 않았을 것만 같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거든. 쓸데없는 생각일 뿐이지. 실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인 소개>

2010년 『현대문학』등단

시집『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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