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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제주4·3, 하나의 나라를 꿈꾼 사람들
[207호] 2019년 03월 25일 (월)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 제주4·3유적지 '큰넓궤' (사진제공 : 김태환)  

   70년 전,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과 인근 오름들에서 봉화가 올랐다. 그러나 제주4·3의 시작은 1948년 4월 3일이 아니라 1947년 3월 1일이다. 4·3은 그 날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의 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기호이기도 하다.
   정부의 제주4·3특별법에서도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4·3의 시작을 1947년 3월 1일로 규정한 것은, 4·3 발발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47년 제주도 3·1절 기념대회가 끝난 직후 경찰의 발포에 의해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은 이후의 미군정의 살인적인 탄압으로 이어져 4·3을 낳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4·3의 중요한 또 하나의 배경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이루고자 했던 대중적 투쟁에 있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는 김구를 비롯한 일부 민족지도자들도 분단을 앞둔 단독선거라 하여 반대했고 전국에서 선거반대투쟁이 일어났다. 제주도에서는 과반수에도 못 미치는 선거 결과로 3개의 선거구 중 2개구의 선거구가 무효화되었다. 이로써 제주도는 5·10단독선거를 저지한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제주도민 10분의 1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되었고 40여년에 걸친 금기의 시간이 이어졌다. 2017년 7월 25일 기준, 특별법에 의해 인정된 희생자만 해도 14,233명이다. 희생자 신고를 통해서 이루어진 공식적인 수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부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희생의 80% 이상은 경찰과 군인 등의 군경토벌대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군경토벌대와 무장대, 그 사이에서 무수한 제주도민이 죽어갔다.
   제주 섬은 고립된 채 피와 눈물과 시체의 三多島가 되어 갔다.
   4·3에 대한 기억이 표출되기 위해서는 4·19라는 혁명적 상황을 기다려야 했다. 4·19혁명 직후 1960년 5월 23일 국회에서 거창, 함양, 남원, 영암, 함평, 문경 등지의 양민학살사건조사단 구성이 의결되자 제주에서도 4·3진상규명에 대한 여론이 높아졌다. 그 계기는 1960년 5월 제주대학교 학생 7명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조직해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호소문을 『제주신보』에 발표한 것이었다. 당시 국회의 양민학살 관련 현지 조사에 앞서 제주신보사가 6월2일 사고를 통해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를 접수하자 사흘만에 1,259건, 인명피해는 1,457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진상규명 논의는 중단됐고, 오랜 세월 금기시됐다. 쿠데타 직후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인사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 금기를 깬 것은 제주 출신 작가 현기영이었다. 1978년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순이삼촌>은 북촌리 집단학살을 그린 소설로써 4·3의 참혹상과 그 상처를 폭로해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작가는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 등 필화사건을 겪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4·3에 대한 기억들이 분출되기 시작했고, 이는 조직적인 진상규명운동으로 결집되었다. 1998년 50주년을 전후해 제도권에서 4·3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쟁취운동이 제주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새천년을 넘기지 않겠다는 제주도민의 헌신적인 투쟁은 1999년 12월 16일, ‘제주4·3특별법’ 통과로 결실을 이루었고, 2003년에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정부 차원에서 2년여 동안의 조사를 통해 확정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피해상황을 자세히 적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진상조사보고서는 제주4·3사건을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으로 규정했다. 이제 제주4·3에 대한 공식역사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진상조사 이후 제주4·3은 평화공원 조성, 기념관, 재단 설립 등 명예회복 과정으로 이어져 탄탄한 과거사청산 작업이 진행 중이다. 김대중정권에서 시작된 진상규명은 노무현정권의 명예회복으로 이어졌고, 2014년 박근혜정권은 4·3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했다. 제주 섬의 공고한 연대는 4·3을 공식화 하는 결실을 맺었고, 심지어는 보수정권의 공식 인정까지 이끌어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이 탄탄해질수록 항쟁의 기억은 사라져가고 있다. 피해자의 모습으로만 형상화 되고 있다. 4·3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은 약화되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어간 억울한 죽음만을 이야기한다. 참혹한 죽음 앞에서 항쟁의 성격은 움츠린다. 그 참혹한 죽음 앞에서 단독정부수립반대와 통일운동이라는 4·3, ‘저항과 항쟁’의 모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은 늘 마주한다.
   이제 70년의 세월 속에서 그래도 시대에 저항했던 그 시간들의 한 자락은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 당시 제주도민은 피해의 당사자이기에 앞서, 단독선거를 저지함으로써 통일독립국가 수립의 의지를 보여준 당당한 주체들이었다. 그 당당한 역사의 시간들을 조금은 기억해야 되지 않을까? 역사 앞에서 모두가 희생자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희생은 당당하고 적극적인 삶의 표현이기도 하다.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4·3의 사람들을 기억하기를 소망한다.
   제주4·3을 학살의 초점에만 맞춘 채 제주도민이 역사 속에서 항쟁의 주체로 존재했던 과정을 배제하는 것은 현재의 진상규명운동이 ‘절반의 기억투쟁’에 머무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학살론은 국가폭력의 문제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이것만이 강조될 경우 제주도민을 피해자의 입장에만 놓이게 함으로써 가해자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저항적 기억투쟁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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