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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찍히는 이들의 욕망
‘카오리 섹스 다이어리’에 대한 비판적 회고
[206호] 2018년 11월 19일 (월) 김 현 호 사진비평가, VOSTOK 프레스 대표
   
  △ 지난 9월 8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연 여성, 이미지 생산자> 포럼의 홍보물. 사진 속의 인물은 일본의 무용수이자 모델인 엔도 카오리다.  

   담담한 말투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이 일본 여성을 나는 언젠가 본 적이 있다. 한때 열심히 보던 사진가 아라키 노부요시의 책이나, 도쿄나 오사카에 갈 때마다 들르던 전시장의 사진 속에서였을 것이다. 풀어헤쳐진 차림을 하고 어쩌면 기묘한 자세로 결박되어 있었을 그의 무심한 눈빛을, 나는 분명 마주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발음하는 자신의 이름, ‘카오리’는 대단히 낯설다. 아니, 솔직히 그의 이름을 궁금해한 기억도 없다. 아라키의 카메라에 담긴 인물은 그저 한 장의 사진처럼 느껴진다. 그때는 몇 년 후 카오리가 사진 속에서 걸어나와 자신의 경험을 말하게 되리라고는, 그리고 내가 이렇게 진땀을 흘리며 그 말을 받아쓰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라키 노부요시는 올해 일흔일곱 살이 된 일본의 사진가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풍기는 역한 냄새를 거침없이 펼쳐 보여주는, 그리고 그것에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특히 작업의 양과 스펙트럼, 대상에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투사하는 사진적 능력은 대단했다. 그는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서 벗은 몸을 찍다가 밖으로 나와 길고양이를 찍고, 도쿄의 불상을 찍고, 지하철을 찍고, 해가 저무는 하늘을 찍는다. 그러고는 죽은 아내 요코의 빈 자리를 서늘하게 찍어낸다. 그 사진들은 모두 강렬하고 아릿하다. 이를테면 아라키는 마술사처럼 소매 안에서 끝없이 카드를 꺼내는 작가였다. 

   한때는 그런 사진들로 논쟁적인 예술의 자리에 머무를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그것은 꽤 낡고, 조금은 비릿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자신의 시각적 관심과 욕망을 마구잡이로 찍고 드러내는 남성의 사진이 당대적 의미와 좌표를 획득할 수 있었는가? 그 질문은 삼십여 년 전 허수경의 첫 시집에 대해 그를 “선술집 주모”에 비유했던 송기원의 발문보다, 그것을 다시 인용하며 “뭇 사내의 아픔과 슬픔을 너른 품으로 감싸 안고 다독여서는 다시금 세상과 맞서 싸울 힘을 불어넣어 준다”고 쓰는 최재봉의 기사가 왜 훨씬 읽기 역겨운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일과 비슷하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때는 그랬다. 그런 아라키의 사진이 청량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아주 오래 지난 일은 아니다. 사진이라는 어린 매체에게는 유난히 거창한 책무가 주어지곤 했다. 그것은 사진이 이미지 생성 과정에서 인간의 손이 개입되지 않는 광학적인 존재이므로 어떤 매체보다도 세계의 진실을 더 잘 기록할 수 있다는 대단히 단조로운 믿음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진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수단이어야만 했고, 한편으로는 고통받는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창문과도 같은 존재여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사진은 예술 제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괴이한 집념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렇게 복잡한 강박에 시달리는 사진들이 줄지어 선 풍경은 사뭇 답답했고, 그들은 꽤 빈번히 보는 이를 괴롭혔다. 

   반면 아라키가 광포하게 찍어대는 사진들은 자신이 고작 헐벗은 이미지들의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거창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성애와 육체의 이미지에 끈질기게 따라붙는 죽음의 그림자를 강렬하게 누설했다. 아라키가 활동을 시작하던 60년대 말과 70년대 초반의 시기는, 사진이 (대문자) 역사에 대한 의구심을 품던 때였다. 그때 아라키의 사진은 오히려 서구에서 시도되는 사적 다큐멘터리들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아라키의 사진에서 무엇이 바뀌었는가? 사진 이미지는 입자 한 알도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다. 아라키는 여전히 괴물처럼 끝없이 사진을 토해낸다. 하지만 카오리의 고백은 아라키의 사진이 지닌 가장 큰 강점 하나를 치명적으로 부숴놓았다. 그것은 아라키가 찍히는 이들의 욕망을 다룬다는 점이다. 즉 어떤 이들에게는 사진을 찍혀서 시각적 탐욕의 대상이 되려는 기이한 욕망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죽음이라는 허무를 견뎌내는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기록 영화에서 기꺼이 옷을 벗고 깔깔대며 아라키의 카메라 앞에 서는 여성들과, 그것을 자신이 자란 일본의 빈민가인 시타마치(下町) 정서로 설명하는 아라키의 천연덕스러움은 뒤엉켜 스산한 느낌을 주곤 했다.  

   하지만 아라키의 카메라 앞에서 밧줄에 묶여 사진에 찍히는 이가 사실은 감정적으로 내몰린 상태였다면 어떨까? 과연 보는 이들에게 그 사진은 예전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아라키가 싫다는 그와의 촬영 장면을 억지로 방문객에게 공개한다면? 그의 사진을 모아서 ‘카오리 섹스 다이어리’를 몰래 출간했다면? 그리고 항의하는 그에게 ‘중요한 것은 네가 아니라 내 사진’이라고 입을 막는다면? 이것은 아라키의 사진이 순환하는 경로 중 하나를 완전히 틀어막는다. 작가가 비윤리적이라서 작업이 무의미하다고 단순히 결론내리는 것이 아니다. 찍히는 이들의 욕망과 감각이 소실된 아라키의 작업은, 그저 자신이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쓰는 것만으로 예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던, 즉 소설과 현실을 좀처럼 구분하지 못하던 양차대전 전후 일본 사소설의 사진적 번역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게 아라키 노부요시는 지나간 과거가 된다. 우리는 그의 사진이 놓였던 과거의 맥락에서 그것이 지녔던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대의 작업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둔탁하고 단조로워지고 말았다. 이제 아라키의 사진은 우리의 시공간을 더는 점유하지 못하고 천천히 잊혀질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백일몽 안에서 외롭게 늙어갈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함께하자고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뉴욕 타임즈>는 카오리의 인터뷰를 상세히 실으며 “에로틱 사진가의 뮤즈가 그의 비평가가 될 때(When an Erotic Photographer’s Muse Becomes His Critic)”라는 제목을 달았다. 실로 그러하다. 아라키와 그의 세계를 과거로 환원시킨 카오리의 말들은,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던 것들의 의미를 처음부터 다시 배울 것을 요구한다.

   

 △ 아라키 노부요시가 카오리의 허락 없이 출간한 <포토그라피카Photographica> ‘카오리 섹스 다이어리’ 특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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