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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가짜뉴스’속의 불안들과 ‘참된 삶’이라는 희망
[206호] 2018년 11월 19일 (월) 류보선 문학평론가
   
  △ 사진출처 : ClipartKorea  

   ‘가짜뉴스’ 문제로 논란이 뜨겁다. 뉴스란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전파하는 것일 터, 그런데 사회구성원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허무맹랑한 비-사실들만을 넘치도록 담고 있는 ‘가짜뉴스’가 연일 쏟아지고 있으니 논란이 없을 리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가짜뉴스’가 놀랄 만한 속도로 사회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된 까닭인지 팩트를 체크하면 할수록 사실들에 기초한 타당한 가설을 제기하면 될수록 ‘가짜뉴스’는 세상을 비웃듯 더욱 더 번져간다. 우리의 예측을 넘어서는 ‘가짜뉴스’의 확산이 어떤 요인들에 의한 것인지를 당장 답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러나 ‘가짜뉴스’의 예측 불가능한 확산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가짜뉴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 다시 말해 ‘가짜뉴스’의 이 거센 불길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팩트체크’를 반복하거나 아니면 팩트에 기반한 타당한 결론을 제시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시도가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 한 번 더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도대체가 말이 안 돼 보이는 ‘가짜뉴스’들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읽어내고 그에 따른 근원적이고도 차분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

   현재 널리 유포되고 있는 ‘가짜뉴스’들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우선은 ‘문재인 대통령 건강 이상’, ‘신지하철 노선과 북한 땅굴 연결’, ‘국민연금 북한 200조 지원’, ‘대북 쌀 지원에 따른 쌀값 폭등’, ‘대북 귤 상자 의혹’ ‘개헌 하면 공산주의 국가’ 등등 정치와 관련된 설들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가 하면 동성애와 관련된 정보 조작 뉴스도 많다. ‘메르스 에이즈 결합 슈퍼 바이러스 창궐설’이 퍼지는가 하면 ‘동성애 합법화되면 수간, 근친상간도 합법화’된다는 설도 우리 사회 깊숙이 퍼져나가고 있다. ‘난민’ 관련 뉴스도 ‘가짜뉴스’의 주요 소재다. ‘노르웨이 강간 100% 이민자설’이나 ‘스웨덴 난민 강간율 1000배설’ 등도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만들고 있는 ‘가짜뉴스’들이다.

   ‘가짜뉴스’를 통해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들은 한마디로 역대급 허무맹랑이고 견강부회라 할 만하다. ‘가짜뉴스’들은 전혀 사실에 근거하지 않거나 아니면 사실들 사이의 자의적이고도 비합리적인 연관에 기초해 있다. 가령 새로운 지하철 노선과 북한 땅굴 중 그 어떤 것도 연결된 것도 연결을 계획하고 있는 것도 없는데, 다시 말해 그 어떤 증거도 없는데, ‘신지하철 노선과 북한 땅굴 연결설’은 의심할 필요 없는 사실로 둔갑시키는가 하면, ‘대북 쌀 지원’과 ‘(약간의) 쌀값 인상’ 사이에는 그 어떤 인과관계도 없건만 이 두 사실을 자의적이고 폭력적으로 결합시켜 ‘대북 쌀 지원에 따른 쌀값 폭등설’이라는 연금술적 결론을 도출하기도 한다.

   ‘가짜뉴스’는 치밀한 논증의 과정을 거쳐 합리적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나 자료만을 선택적으로 배열해 자신의 역사철학에 부합하는 결론을 짜낸다. 그렇다고 ‘가짜뉴스’를 무시해선 안된다. ‘가짜뉴스’들은 결론을 내린 순간부터, 그리고 ‘가짜뉴스’라고 호명된 이후부터 정말로 치밀해지고 분주해지는 까닭이다. ‘가짜뉴스’란 사실과 사실들의 관계를 왜곡한 결론을 어떻게든 정당화하지 않으면 생명이 다하는 바, 그 왜곡된 결론을 이어가려면 결론을 내고부터는 처절할 정도로 분주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짜뉴스’들은 ‘가짜 논증’, ‘가짜 질문’, ‘다수 편승’, ‘대중적 호소’, ‘불완전한 비교’, ‘장광설’ 등등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예컨대 ‘가짜뉴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 정부는 한없이 무능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쌀 100만톤이나 돈 200조를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북한으로 보내는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가짜뉴스’에는 어느 대상이나 존재에 대한 일관성도 현실성도 없다. 필요에 따라서 어느 땐 엄연한 현실 앞에 꼼짝도 못하는 바보이다가 어느 때엔 어느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한순간에 뛰어넘는 초능력자가 된다. 그렇게 시차(時差, 視差)가 무시되고 역사적 조건이 무의미해진다. 한마디로 ‘가짜뉴스’를 유지하기 위해 사실과 사실 사이의 인과관계를 왜곡하는 것은 물론 법률, 도덕, 제도, 규범, 경계, 차이, 계급관계, 젠더감성 등 현실원칙 전반을 자의적으로 재정의하고 재배치하는 일을 스스럼없이 행한다. ‘가짜뉴스’는 이런 방식으로 보편타당한 가설들을 부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보편타당한 결론들을 압도하기도 한다.

   허무맹랑한 설을 유지하기 위한 처절한 사후적 정보 조작이나 논리 조작도 문제지만 ‘가짜뉴스’의 잠복되어 있는 더 큰 문제는 혐오, 그것도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다. 아니, 악의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일찍이 폴 리쾨르나 테리 이글턴이 말한 악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가짜뉴스’는 정말 악의적이다. ‘가짜뉴스’는 우리 사회의 호모사케르로 겨우 연명하는 존재들이, 그리고 어쩌다가 우리 사회에 겨우 도착한 이방인들이 그들의 생존을 위해 곧 우리 사회를 파괴할 것으로 정보를 지속적으로 유포한다. 이 ‘가짜뉴스’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나 연대의식, 죄책감, 무조건적인 환대 의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가짜뉴스’는 그 동안 인간이 힘겹게 지켜온 인간의 이성과 그것이 쌓아온 질서 전체를 파괴하면서 그것에 어떤 망설임도 없다. 즉 ‘가짜뉴스’에는 우리의 삶 전체를 파괴하면서 오히려 쾌락을 느끼는 가학성과 도착성이 작동하고 있다.

   자세히 분석하지 않아도 이렇게 허무맹랑하고 그야말로 악의적이건만 ‘가짜뉴스’는 전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프게 현실을 직시하자면 확산일로다. 사태가 여기에 이른 만큼 우리는 이제 ‘가짜뉴스’를 달리 보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팩트체크’를 통해 ‘가짜뉴스’가 ‘가짜뉴스’임을 밝혀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짜뉴스’들이 말하는 진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토록 허무맹랑한 ‘가짜뉴스’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가짜뉴스’의 텍스트 사이에 또 다른 목소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겠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하기 아직 시기상조인지 모른다. 그러나 추측해볼 수 있는 하나의 목소리 정도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가짜뉴스’가 만드는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집중적으로 유통되는 것은 세상이 변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존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가짜뉴스’의 내용 또한 그렇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롭고 아슬아슬한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방향도 없이 세상이 바뀌는 것이 그들은 두렵다. 갑자기 냉전체제가 깨지고 남북통일이 되어 자신의 삶이 더 주변부로 밀려갈 것도 두렵고, 자신보다 더 상품성이 높은 대규모의 이방인들이 들어와 자신들의 존재기반을 흔들 것도 두렵다. 그 두려움이 이방인들과 약자들에 대한 ‘가짜뉴스’들에 현혹되게 만든다. 그러니까 ‘가짜뉴스’에 대한 신뢰는 절대로 그 ‘가짜뉴스’에 대한 믿음에서 촉발된 것만이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위태로운 삶이 더욱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방어기제 혹은 반동형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가짜뉴스’의 광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순한 ‘팩트체크’ 정도에 그쳐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앞으로 우리가 겪을 변화, 그러니까 냉전체제의 해체와 이방인의 도래가 우리 사회 전체를 ‘위태로운 삶’에서 ‘참된 삶’이 가능한 곳으로 진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를 참된 사회로 진화시킬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 동의를 얻고 그 진화를 소외되는 존재들 없이 더불어 만들어가겠다는 진심을 보여주어 신뢰를 공유하는 일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은 분명 아닐 것이다. 우리가 미래에 대한 신뢰를 공유해야 할 대상이 저 허무맹랑한 ‘가짜뉴스’에 현혹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쉽지 않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히려 쉽지 않기에 들메끈을 고쳐매볼 만하지 않은가.

   ‘가짜뉴스’와 맞서기 위한 ‘참된 삶’의 추구, 바로 우리가 들메끈을 맬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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