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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탈인간적 반성을 위하여
[205호] 2018년 10월 01일 (월) 김태환 『사랑의 역설』 저자
   
△ <애미니즘> 전시 포스터 (출처 : 일민미술관 홈페이지)
 

 

 

 

근대성과 애니미즘

  2013년 12월 일민미술관에서 <애니미즘>이라는 전시가 진행됐다. 이는 2012년 봄, 안젤름 프랑케(Anselm Franke)라는 독일 큐레이터에 의해 기획된 전시로, 중국 심천 등 도시를 순회 후 서울에 도착한다. 당시 박찬경, 구동희 등 국내 작가가 <애니미즘> 서울 전시에 협력한다. 일민미술관은 광화문 광장의 대각선 방향에 위치한 미술관이다. <애니미즘>은 3개월 간 전시됐고, 그동안 광화문 광장의 주변부에서 ‘애니미즘’이 적힌 현수막이 펄럭이게 된다.

  이 펄럭임을 예사롭게 볼 수 없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동상이 세워진 광화문 광장은 박정희 정권이 내세웠던 근대화, 과학화를 상징하는 서울의 중심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며, 이에 따라 물신숭배나 동물숭배의 현상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근대성과 애니미즘의 공존은 기이했고, 익숙했던 광화문 일대의 풍경을 낯설게 바꿔놓았다.

  익숙한 것이 낯설게 바뀔 때, 사유와 물음이 촉발된다. 이성과 과학은 무엇을 얼마큼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가? 주어진 이성과 과학만큼만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이를 뺄셈적 지각이라 말할 수 있다. 뺄셈적 지각이란 세계를 인식하는 데 있어 무엇을 더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이성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은 것은 일단 배제하거나 유보하는 방식의 지각 작용이다. 이와 같은 지각을 바탕으로 대상에 대해 사유하고 행위 하는 것은 폭력을 예견한다. 세계를 과학적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는 합리성의 이름표를 통해 대상을 조각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표가 곧 대상은 아니다.

  이름표 붙이기의 과정은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과정이다. <애니미즘> 전시 역시 주체와 객체, 자연과 문화를 나누는 이원론 세계의 경계들을 보여준다. 보이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과학은 많은 것을 알지만, 너무나 많은 것을 모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앎과 모름 이 모든 것에 경계가 있다. 이성과 과학이 설계한 경계는 임의적이다. 임의적이라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해체가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계의 해체는 두려운 일이다. 뺄셈적 사유를 통해 정리한 세계가 다시 카오스 상태로 회귀하는 모습은 매우 낯설고 이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체는 파괴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광화문 일대에 애니미즘이라는 개념이 활보하는 것도 일종의 해체다.

 

동물원, 동물 감옥

  기린, 코끼리, 사자, 호랑이, 원숭이. 철장 앞에 이름표가 있고 뒤에는 동물들이 갇혀있다. 동물원은 인간과 자연을 경계 짓고 자연을 박제시키는 곳이다. 여기서 주체는 인간이다. 모든 의사결정권은 인간에게 주어져있다. 청소년 교육, 문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환기 시설, 동물연구, 자연보호 등 동물원은 나름대로의 존재의의를 설정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의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고로 동물원에서 자유로운 동물은 인간 밖에 없다. 이곳은 동물원이 아닌 동물 감옥이다.

  9월 20일 대전 오월드에서 퓨마 ‘뽀롱이’가 우리로부터 벗어난다. 사육사가 우리를 청소한 뒤 실수로 문을 잠그지 않은 탓이다. 마취총을 명중시켰지만 뽀롱이는 별 반응 없이 유유히 사라졌고, 결국 사살된다. 이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슬퍼했고, 과잉 진압이라고 주장하며 분노했으며, 동물원 폐지 주장까지도 곳곳에서 제기됐다. 뽀롱이 사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커지자 유영균 도시공사 사장은 “안타깝게도 일몰이 돼 매뉴얼에 따라 사살했다”고 말했다. 결국 매뉴얼이 뽀롱이를 사살한 것인가? 이 매뉴얼의 주체 역시 인간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9월 26일자 중도일보 기사에서 밝혀진다. 기사는 이번 추석 연휴 오월드 동물원 방문객 수가 작년과 별 차이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여기서 반성과 사유의 부재를 느낀다. 동물의 죽음은 영원한 타자의 죽음일 뿐인가? 그 동물원에서 죽은 이가 내 친구 혹은 인간이었다면 추석 연휴에 그 공간에서 가족들과 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겠는가? 애니미즘적으로 사유해보자. 뽀롱이와 그 모든 동물들에게 영혼이 깃들어있다. 그들은 인간과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관계다. 또한 오월드의 다른 동물들 역시 뽀롱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시선에서 인간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미개해보이겠는가? 인간은 지구 최상위 포식자다.

 

탈인간적으로 반성하기

  무작정 애니미즘의 태도를 찬미하자는 것이 아니다. 또 지금 당장에 동물원을 없애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복잡하게 얽힌 구조들이 그리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나 적어도 상상적으로나마 반성할 수 있다. 내가 알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곱씹어야한다. 이 반성의 토대에는 이원론적 세계와 경계,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개방적 인간중심주의자들은 이미 문명이 인간중심으로 만들어졌으니, 동물도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호의 명분도 끝내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멸종과 진화와 같은 변화는 저마다의 몫이지 인간의 몫이 아니다.

  ‘근대성의 신체’는 만만치 않다. 이 신체는 수많은 명분을 통해 인간중심주의를 지키려 한다. 그러나 이 중심주의는 결국 인간의 갈래마저도 분류하고 정의하려할 것이다. 동물에게 가혹한 인간이, 인간에게 따뜻할 수 있겠는가? 이 가혹함은 물리적 폭력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반성과 사유의 게으름에서도 온다.

  탈인간적 반성은 인간을 외면하는 사유가 아니다. 모든 것과 공존하기 위한 사유다. 공존은 경계에 대한 해체적 사유로부터 온다. 경계의 해체는 세계를 파괴시키는 일이 아니라 다양성과 차이를 드러내는 일이다. 다양성과 차이는 결코 다양한 이름들이 아니다. 다양성은 세계의 미시적 요소들을 굳이 규정하거나 뺄셈하려 하지 않고, 그 자체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발견된다. 발명이 아니라, 발견이다. 이미 있었지만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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