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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혁명의 유산과 한계, 그리고 현대영화이론
현대영화이론의 탄생과 좌파 정치학
[204호] 2018년 06월 04일 (월) 정영권 영화평론가
   
  △ ‘68혁명’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 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인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둘 다 세계를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1848년에 프랑스에선 2월 혁명이 있었고, 같은 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120년이 지난 1968년 전 세계적인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2월 혁명의 여파는 유럽에 국한되었지만 이번엔 프랑스, 영국, 서독, 이탈리아, 체코, 미국, 멕시코, 일본 등 유럽, 북중미, 동아시아를 넘나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 혁명이었다. 비록 그것이 세계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진 못했지만 더 이상 낡은 체제가 지탱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후세의 사람들은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이 해의 세계적 변혁의 물결을 68혁명이라 불렀다.

현대영화이론의 탄생과 좌파 정치학

 68혁명은 영화이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전까지 영화이론은 학문의 영역이 아니었다. 저널리즘 평론과 구분되지 않았다. 또한 초기 소련의 혁명적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나 지가 베르토프 정도를 제외한다면 정치와도 무관해 보였다. 물론 1968년 이전에 영화를 학문적으로 사고했던 이가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크리스티앙 메츠가 있었다. 메츠는 그 시대 프랑스를 지배했던 구조주의의 영향 하에서 지적 작업을 하고 있었다. 레비스트로스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을 인류학에 도입해 구조인류학을 창안한 것처럼, 메츠 역시 소쉬르의 기호학을 영화에 가져와 영화기호학의 문을 열었다. 이것이 현대영화이론의 시초였다. 영화를 음성언어의 규칙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그의 원대한 기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영화가 세계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의미화작용의 산물임을 제시한 그의 업적은 영화를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정태적인 구조주의자로서 메츠는 정치와 거리를 두었지만 그가 정초한 현대영화이론은 그럴 수 없었다. 1968년을 전후한 시기에 장 뤽 고다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오시마 나기사 등 동서양을 막론한 급진적 영화인들은 혁명적 영화를 제작했다. 몇 편의 시나리오를 쓴 경험이 있지만 영화 쪽에선 이방인에 불과했던 극작가이자 연극이론가 브레히트가 68혁명의 시대정신을 구현할 영화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의 소외 효과(alienation effect)는 고다르, 오시마 등 소위 정치적 모더니즘 영화 뿐 아니라 1950년대 가장 보수적이었던 할리우드 멜로드라마(특히, 더글러스 서크 감독)를 분석하는 중요한 분석틀이 되었다.

 급진적인 영화이론의 흐름을 선도했던 것은 역시 ’68년 5월 파리의 봉기를 전 세계에 확산시켰던 프랑스였다. 문학이론지 『텔 켈』을 비롯해 영화비평지 『시네티크』가 급진적 영화제작의 이론적 후원자가 되었다. 거의 현실정치와 무관해 보였던 『카이에 뒤 시네마』나 『포지티프』도 좌회전 했다. 이제 영화이론에서도 좌파들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이론적 자양분을 얻었던 것은 소쉬르, 알튀세르, 그리고 라캉이었다. 소쉬르에게서는 영화를 현실의 창으로 여겼던 이전의 인식(예를 들어 『카이에 뒤 시네마』의 이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앙드레 바쟁)을 뒤집는 무기를 얻었다. 언어학을 역사적 변화와 무관한 정적인 학문으로 만들었던 소쉬르로부터 급진정치의 틀을 가져왔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무엇보다도 언어를 자체의 구조와 과정을 가진 의미화작용으로 본 그의 사고가 주효했다. 물론, 그것은 메츠가 소쉬르를 경유해 정립한 현대영화이론의 성과이기도 했다.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알튀세르는 68혁명 시기 좌파 영화이론가들의 구세주로 모셔졌다. 68혁명의 ‘아이들’을 철없는 파시스트라 비난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까진 아니더라도, 알튀세르는 혁명에 미온적이고 애매한 태도를 취했지만(마르크스주의와 거리를 두었던 푸코가 혁명의 거리를 누볐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이론은 당시 좌파 영화이론가들의 금과옥조였다. 그들은 소쉬르의 의미화작용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결합했다. 쉽게 말해서 영화에는 혁명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의미화작용이 내재해 있는데, 그것은 곧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인 영화의 근원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중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어떤 정신적인 작용이며, 그 해답의 키는 라캉이 쥐고 있었다. 그가 논하는 거울단계의 유아처럼 관객들은 영화(거울)와 자신이 구별되지 않는 환영의 마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대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3차원의 환영을 강화시킨다고 여겼기에, 이제 좌파 영화인들은 원근법을 해체시킴으로써 부르주아적 근대를 파괴하고자 했다. 고다르는 그래서 깊이 없는 평면성의 영화(<주말 Week End>. 1967)를 만들었고, 브라이언 헨더슨은 그것을 비(非)부르주아적 카메라 스타일이라 격찬했다.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의 이론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꿈꾸자. 하지만 리얼리스트가 되자”는 68 청년들의 구호만큼 낭만적이되 모순적인 것이었다. 한편으로 발 딛고 서있는 사회와 역사의 무게를 도외시 한 지식인들의 관념론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부르주아계급은 패퇴하고 있었지만 현실세계에서 부르주아들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970년대가 되자 혁명의 열기는 수그러들기 시작했고 전후 축적체제의 위기가 다가옴에 따라 신자유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제 때에 찾아왔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라고 부른 이 기이한 사조는 좌파 지식인들이 68혁명의 쓰디쓴 패배를 위안 삼을 수 있을 만큼 달콤하고 매력적이었다(급진좌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열렬한 전도사로 변신한 리오타르를 생각해보라). 영화이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의미화작용의 산물로 보는 것,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보는 것은 구조주의로 대변되는 거대담론의 산물이었다. 범박하게 말해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의 말랑말랑한 미국 판 문화 버전이라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담론을 논하는 현대영화이론을 ‘대문자 이론(Theory)’이라 비난했다. 이제 데이비드 하비가 유연적 축적, 조절이론 학파가 포스트포디즘이라고 칭한 것에 걸 맞는 파편화, 소수화, 다품종 소량생산의 이론들이 백가쟁명의 시대를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1980년대 영미권 영화이론에서 문화연구와 인지주의의 ‘침공’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대문자 이론에 대한 비판의 좌파 버전이 문화연구라면, 우파 버전은 인지주의였다. 1950년대 후반 영국 신좌파에서 기원한 문화연구는 갈수록 낡은 것으로 여겨지는 계급정치를 기각했고, 신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 혹은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의 부상과 함께 젠더/섹슈얼리티, 인종/민족성, 세대, 지역 등에 천착했다. 그들은 대문자 이론이 가정하는 관객이 이론적·추상적 관객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그런 목소리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소수자들은 거대담론 속에서 침묵을 강요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체성을 포기한 이 각개전투는 반동으로 치닫는 1980년대의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고, 최악의 경우엔 소비 자본주의와 위험한 불장난을 쳤다.

 어쩌면 역사와 사회로부터 가장 초연하게 인간의 인지작용과 지각작용을 심리학적으로 탐구하는 인지주의가 영화이론에 스며든 것은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치적으로 신보수주의가 발흥한 1980년대에 어울리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은 대문자 이론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너무 경도되어 영화를 무의식으로 설명할 뿐, 의식(인지, 지각)을 고려치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 학파의 가장 탁월한 이론가들인 노엘 캐럴과 데이비드 보드웰은 물론 영화이론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특히 영화 스타일의 역사를 제도적·미학적으로 규명한 보드웰의 업적은 눈부신 것이었는데, 그러나 그가 ‘역사적 시학(historical poetics)’이라 명명한 것에는 산업과 제도, 스타일의 역사는 있되, 인간과 사회의 역사는 없었다.

억압적이지 않은 총체성의 (불)가능성

 68혁명 이후 50년, 이 혁명이 영화이론에 끼친 유산과 한계를 다 짚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1980년대 이후 영화이론은 한편으로는 거대담론의 짓눌림에서 해방되어 미시적 영역을 넓혀 왔다. 매체 자체를 사고하는 매체의 정치학은 매체가 재현하는 것을 고민하는 재현의 정치학으로 이동했다. 물론, 들뢰즈의 영화철학이나 디지털 혁명은 영화이론이 다시금 매체 자체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고 있다. 그러나 영토화보다 탈영토화를 중시하는 들뢰즈처럼, 선형적(linear)인 것보다 비선형적인(nonlinear) 것으로 설명되는 디지털처럼 동시대의 영화이론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에 기대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이론(film theory)보다 영화연구(film studies)라는 용어가 갈수록 널리 통용되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 반세기 전 ‘불가능한’ 혁명을 꿈꿨던, 그러나 리얼리스트이고자 했던 68의 청년들처럼 다시금 이론의 총체성을 꿈꿔 본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총체성은 소수자가 억압되지 않되, 파편화되지도 않는 총체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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