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8.6.18 월 13:21
인기검색어 : 논문표절, 조교 문제, 등록금 인상
신문사소개 | 기사제보 | 광고안내 | 호수별 기사보기
> 뉴스 > 학술 서평 > 인문산책
     
[인문산책]사랑과 타자, 그리고 영화적 지각(知覺)
이미지로서의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
[203호] 2018년 04월 09일 (월) 김 태 환 『사랑의 역설』 저자
   
  △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스틸컷  

왜 사랑인가?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말했듯 “사랑의 담론은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사랑의 담론은 때가 아닌 것 같을 때에도 유유히 존재해왔다. 세계가 황폐해지거나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거나, 많은 이들이 끝없이 상처받을 때에도 사랑은 문학, 음악, 연극 등에서 끝없이 재현되는 중요한 소재이자 화두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은 인간을 구원하기도, 파멸시키기도 하는 강렬한 정동(affect)으로도 작용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정동으로서의 사랑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척 친숙하게 느껴질지라도, 정작 사랑이 무엇이냐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사랑의 출현과 동반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문제’와 만나면 더 복잡해진다. 타자는 무한한 세계이자 알 수 없는 세계다. 누군가의 얼굴, 목소리, 전화번호, 가족관계, 성향 등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나 그것들은 어렴풋하다. 그럼에도 타자에 대해 안다고 신나게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들 스스로는 아마 사랑에 대해서도 꽤 잘 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 믿음은 끝끝내 타자의 삶을 파괴한다. 아는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해하려 시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믿음에 반대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모른다고 전제한 뒤, 사랑에 대해 알기 위한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이다.
   사랑은 일종의 이미지다. 타자도 마찬가지다. 이미지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거나 잡히는 것일 뿐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란 단지 지각되는 것이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미지란 ‘물질’이며 ‘운동’이다. 결국 그에게 세계란 스스로가 의식하는 ‘이미지’인데 이것이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지속이란 정지되지 않은 상태이다. 인간은 이러한 지속을 끊임없이 정지로써 규정한다. 가령,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안다. 그리고 몇 시간, 몇 분, 몇 초가 지나가는 중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범위 이외의 것을 규정하지는 못한다. 즉 분초와 같은 단위는 ‘정지됐거나 정지될 시간의 이름’이지, 시간 자체는 아니다. 인간에 대한 지각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내 친구가 대학원생인 것을 알고, 인천에 산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뿐이다. 이것들은 정지된 이름들일 뿐 그 사람 자체는 아니다.

영화적 지속의 분류

   언어는 이미지를 여러 단위로 규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기어코 언어를 빠져나간다. 이미지는 운동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지속의 운동성을 닮은 예술이다. 베르그손은 영화에 대해 비판을 가했지만, 그것은 당시의 영화가 기술적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크게 받는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를 일컫는 것이었고, 이를 일종의 장난감으로 여기는 영화사 초기의 사회적 풍경에 속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영화는 시공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재현의 매체로 발전해왔으며 이에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논의를 적극 수용해 영화를 ‘운동-이미지’의 예술로서 분석하기도 한다. 즉, 영화는 지속의 세계를 어떠한 매체보다 생생하게 포착해낼 수 있는 예술인 것이다.
   세계가 지속이듯이 타자와 사랑 역시 지속의 이미지다. 따라서 영화가 담아내는 지속의 미학, 즉 영화적 지각은 사랑과 타자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운동-이미지의 지속이며 쇼트의 연쇄라고 해서, 모든 영화가 지속의 세계를 담아내는 좋은 영화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특히 몽타주라고도 불리는 편집기법은 감독의 스타일에 따라 영화를 ‘취사선택된 세계’로서 제시하기 때문에 이를 보는 관객이 정말로 ‘지속의 세계’를 마주하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물음이 제기된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소비에트 몽타주 이론가이자 감독이었던 에이젠슈타인에 대해 “에이젠슈타인은 사유를 전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에는 모든 예술들이 갖는 가장 매혹적인 특징인 말할 수 없는 모호함이 전혀 없으며 공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비판한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말할 수 없는 모호함’이다. 몽타주가 정지에 가까운 지속이라면, 그가 말한 ‘모호함’이란 운동에 가까운 지속이다.
   정지에 가까운 지속과 운동에 가까운 지속을 영화언어로 분류하자면 전자는 ‘몽타주와 클로즈업’으로 후자는 ‘롱테이크와 롱쇼트’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몽타주와 클로즈업은 이미지가 범람하는 현대사회를 닮았다. 특히 우리가 미디어에서 손쉽게 접하는 광고, 드라마, 예능 등은 규격화된 몽타주와 클로즈업의 향연이다. 이는 이미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기법으로서 판단의 여지나 여백을 제공하지 않는다. 즉, 보이는 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반면 롱테이크나 롱쇼트는 리얼리즘의 미학으로서 앞서 언급한 타르코프스키나 국내에서는 홍상수가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영화언어다. 특히 TV프로그램에 익숙하거나 빠른 호흡의 영화를 즐기는 관객의 경우에는 이러한 언어에 지루함을 느끼기 쉽다. 길게는 10분 이상씩 카메라가 고정된 채 한 장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지루함은 쇼트를 ‘다 봤다’는 착각에서 기인한다. 카메라가 고정돼있더라도 프레임 안에 재현되는 세계는 끊임없이 운동한다. 봐야할 것은 너무나 많고 이 운동들을 다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영화가 사랑을 재현하는 방식

   영화가 사랑을 재현한다면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 정답이 있는 물음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롱테이크와 롱쇼트’의 언어를 선호한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이에 좋은 사례가 된다. 이 영화는 꿈같은 영화다. 즉, 한마디로 요약하기 힘든 꿈과 같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 것이다. 영화를 찍기 위해 일본의 나라현 고조시를 방문한 영화감독 태훈의 이야기, 그리고 혼자 고조시로 여행을 간 혜정과 그곳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일본인 유스케의 이야기가 분절된 듯 하나로 존재하는 영화다.   
   우선 생각해보자. 사랑의 사건을 영화로 재현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프레임을 잘게 조각내는 방법과 가능한 한 어떤 것도 조각내지 않는 방법.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후자를 택한다. 롱테이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사랑, 그리고 침묵의 순간을 포착하려 한다. 고로 이 영화는 사랑의 시간을 오롯이 담아내려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몽타주와 클로즈업으로 재현된 사랑’과 ‘롱테이크와 롱쇼트로 재현된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클로즈업은 특수한 지점에 주목시킴으로써 사랑의 순간을 포착한다. 당신의 눈, 붉은 볼, 손의 떨림, 마른 입술. 이를 단서로 나는 사랑을 확신하고, 그것을 ‘안다’는 착각에 빠진다. 설레는 착각이다. 반면 롱쇼트는 사랑의 순간을 가능한 한 넓게 포착한다. 나는 무엇을 봐야할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진다. 즉, 그 순간이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게 된다. 그럼에도 그 순간의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것만큼은 안다. 이것이 바로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사랑의 사건을 재현하면서도 사랑을 모른다고 말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가 운동에 가까운 지속인 ‘롱테이크와 롱쇼트’를 적절하게 활용했기 때문이다.
   지속에 대한 지각은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대상을 함부로 규정하거나 정지시키지 않고 지속으로서 면밀히 바라본다. 보이는 것이 넓어지고 관점이 다층적으로 쌓여나가면 세계가 바뀐다. 메를로 퐁티는 「영화와 새로운 심리학」이라는 논문에서 이를 너무나 명료하게 표현한다. “사물 사이의 간격-예를 들어 가로수 사이의 공간-을 사물로 보게 되고 사물 그 자체-거리의 가로수-를 배경으로 볼 수 있게 되면, 우리의 세계상은 전복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제 다시 당신을 보고, 사랑의 기억을 되새기자. 되도록 아주 천천히, 꼼꼼하고도 넓게 보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들을 배경으로 돌리고 그 사이의 지속성을 바라보자. 내가 아는 타자가 거기에 있던가? 내가 한 것이 여전히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 모르는가? 물음이 곧 답이다. 물음이 없는 답은 허상이다. 지속에는 답이 없고, 지속되는 물음만이 있다.

△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스틸컷

ⓒ 동국대학원신문(http://www.dgugspres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페이스북 방문해 주세요!
더 많은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육방송국 동국대학원신문 동대신문 동국포스트
동국대홈동국미디어컨텐츠 센터동대신문교육방송국동국포스트개인정보처리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04620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 1길 30 동국대학교 학술관 3층 대학원신문 | 전화 : 02-2260-8762 | 팩스 : 02-2260-8762
발행인 : 한태식 | 편집인 : 이철한 | 편집장 : 김세연 | 발행처 : 동국대학교 대학미디어센터 | 청소년보호책임자 : 문서영
Copyright DGUGSPRESS. All rights reserved. mail to dgupress@dongguk.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