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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생의 마지막 날 시작하는 사랑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202호] 2017년 11월 06일 (월) 김세연 편집위원
   
     

  앞으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과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게 될까. 나는 아마 고향에 내려가 사진들을 불태우며 그간의 삶을 돌아볼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익숙한 장소를 여행하며 통장의 잔고를 거덜 낼 것이다. 평소 아니꼽게 여기던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거나, 아니면 미안한 사람을 찾아가 읍소할 지도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그것은 이제까지의 삶을 정리하는 일이 될 것이다. 끝을 실감한 이상 새로운 일을 벌이지는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여기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랑을 시작하는 소녀가 있다. 췌장암에 걸려 살날이 일 년이 채 남지 않은 여고생 사쿠라는 여느 또래 아이들보다 더 활기 넘치고 개척적인 삶을 살아간다. 츠키카와 쇼 감독의 영화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소녀를 등장시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을 긍정하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스미노 요루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일본에서 연간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야기는 늘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남학생 하루키가 우연히 반에서 가장 인기 많은 여학생 사쿠라의 일기장을 줍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루키는 머지않아 사쿠라가 세상을 떠날 것이라는 비극적인 진실을 알게 되는데, 사쿠라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을 연민하거나 동정하지 않는 하루키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사쿠라는 막무가내로 하루키에게 돌진하고, 하루키는 자꾸만 자신의 삶에 엮여드는 사쿠라에게 부담을 느끼면서도 점차 마음이 기울어감을 느낀다.

  영화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르익어가는 장면들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관객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삶의 자세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사쿠라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이별’이 아니라 ‘만남’의 시간으로 채운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타인과의 역사를 시작한다는 것과도 같다. 죽음을 앞두고서도 ‘역사를 시작’하는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마지막을 ‘죽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살아가는’ 행위로 채우겠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사실 영화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 자체는 크게 새롭거나 신선하지 않다. 췌장암과 남녀 간의 사랑, 흐드러진 벚꽃과 달콤한 듯 애잔한 배경음악 역시 일본 청춘 멜로물의 공식에 충실하다. 그런데 이런 구태의연한 조합에도 러닝타임 내내 마음이 움찔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씨앗이 발아하는 듯 에너지로 가득한 두 주인공을 보고 있으면, 내게도 순수한 열정 같은 것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과 그 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잔영처럼 나를 드리우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 사쿠라는 하루키에게 벚꽃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이미 벚꽃은 떨어진지 오래. 의아한 반응을 보이는 하루키에게 사쿠라는 아직도 벚꽃이 피어있는 곳이 있다고 말한다. 사쿠라에 따르면 벚꽃은 지는 게 아니라 숨어있는 것이다. 다 끝난 것 같을 때도 그 안에 싹눈을 품고 있어서 언제든 따뜻한 햇살이 나면 단숨에 만개한다. 과연 두 사람은 벚꽃을 보러 갈 수 있을까. 만물이 생명을 잃어가는 가을. 나도 모르게 권태로운 일상에 침잠되어 간다면 고민해보자. 나는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사쿠라의 웃음을 떠올려보자. 이미 오래 전에 저버린 줄 알았던, 벚꽃의 싹눈 같은 생기가 조심스레 움틀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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