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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자연화된 우승열패의 구도와 일상의 폭력성
[202호] 2017년 11월 06일 (월) 허윤 연세대학교 젠더연구소 연구원
   
△ John Singleton Copley, <Watson and the Shark>, 1778.
     
 

  요즘 어린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서는 <상어 가족>이라는 동요가 인기다. 아이들뿐 아니라 20대 사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어 유튜브 누적 조회수 10억 뷰를 기록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노래를 뜯어보면, 그다지 교육적이지는 않다. 3대로 이루어진 상어 가족을 중심으로 한 이 노래는 젠더화된 가족과 생태계의 포식자 질서를 잘 보여준다. “귀여운 아기 상어”, “어여쁜 엄마 상어”, “힘이 센 아빠 상어”, “자상한 할머니 상어”, “멋있는 할아버지 상어”로 이루어진 상어 가족은 바다의 포식자답게 작은 물고기들을 몰고 다니며 날카로운 이빨을 뽐내며 사냥을 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반전이 있다. 노래의 화자가 물고기들로 바뀌면서 “상어다, 도망쳐”, “살았다, 오늘도 살았다, 휴” 등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짧은 동요 안에서 노래의 화자가 바뀌는 바람에,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할 것인가 잠시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유튜브 영상을 보면 쉽게 답을 알 수 있다. 유튜브에서 제공하는 노래의 공식 동영상에서는 바다 속 상어 가족이 최상위포식자로서 작은 물고기들을 쫓고 있다. 심지어 마지막 장면에서는 포크를 든 상어 가족 앞에 작은 물고기들이 나란히 서있고 모두 함께 춤을 추며 노래를 마무리한다. 모두 함께 노래하자는 가사와 달리 작은 물고기들은 식탁 위에 놓인 것처럼 보이는 구도이다.

  어린 아이들이 즐기는 동요에 포식자의 질서를 집어넣어, 스스로를 상어가족에 감정이입하게 하는 동요는 ‘우승열패’의 한국사회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상어와 동일시하는 어린이를 상정하는 것이다. 물론 포식자 동물을 형상화하는 아동용 컨텐츠는 다수 있다. 사자나 곰 등 다양한 동물들이 동요나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냥을 즐거움의 원천으로 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제 쫓는 자에 동일시하는 동요가 어린아이들에게 교육용 콘텐츠로 제공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약한 물고기를 공격하는 상어가 되라고 배운다. 성공한 개인이 되라는 신자유주의의 질서는 약자의 위치를 비가시화한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물고기들의 하루는 후경화된다. <상어가족>에 내재한 폭력성은 생태계의 질서로 자연화, 정당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화된 우승열패의 구도는 일상의 폭력화를 가져온다. 스스로를 상어라고 생각하는 우리는 피해와 가해가 자로 그은 듯 분명하기를, 가해자는 가해자답고, 피해자는 피해자답기를 요구한다. 피해자가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피해와 가해의 구도는 그리 단순치 않다. 한 여자 영화배우가 촬영 시 벌어진 성추행을 고발했다. 강제적 추행이라는 고소인 측의 의견과 “감독과 사전 합의가 모두 된 사항이며 감독의 지시 아래 주어진 콘티대로 연기 했을 뿐 추행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피고인 측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남자는 ‘당당하게’ 언론 앞에 나섰다. 하지만 피해자의 기자회견장에는 변호사와 여성단체들이 자리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상황이다. 이에 포털 사이트 기사의 댓글은 ‘당당하면 여배우도 직접 기자회견장에 나타나라’는 명령이 등장한다. 공론장에 나서는 것으로 피해의 ‘당당함’을 증명하라는 요구이다. 고소를 진행하는 것 자체가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설명은 통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와 가해는 태도로 설명된다. 피해자는 피해 사실 앞에서 결백함을 입증해야 한다는 요구가 정언명령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는 순수한 피해자, 흠 없는 피해자라는 피해자 상과 조우한다.

  순수한 피해자는 가해자나 공론장 앞에서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폭력적이다. 피해자가 오히려 자신의 피해를 통해 약자가 되는 경험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공개적인 장소로 나오라는 요구는 피해자의 자기검열로 이어진다. 내가 공론장에 나갔을 때 얼마나 순수한 피해자가 될 수 있는가를 자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피해자의 사회적 위치나 경제적 계급과도 관련이 없다. 최근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 웨인스타인이 유명한 여배우에게‘도’ 성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정상 스타들도 웨인스타인의 추행이나 ‘유혹’을 거절할 수 없었다. 거절하는 경우, 캐스팅이 불발되거나 업계에서 매장당할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상어’로 보이는 사람들도 강요된 선택에 직면한다. 때로 누군가는 그의 ‘유혹’이 업계에서의 성공을 보장해줄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다. 자신의 피해와 앞으로의 성공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피해 사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관계에서 선택의 자유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어와 물고기의 관계처럼, 물고기는 운이 좋아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 외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평생을 성폭력, 포르노그래피 등과 싸운 급진적 페미니스트 수잔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ler)는 최근 뉴욕타임즈에 “휴 헤프너는 나의 적이었다”라는 글을 발표했다(Susan Brownmiller, “Hugh Hefner was My Enemy”, New York Times, 2017.9.29.). 그녀는 사람들이 휴 헤프너가 1950년대의 성적 억압을 깨고, 쾌락을 긍정했으며, 낙태권과 시민권, 언론의 자유를 지지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장면을 보면서 한탄한다. 휴 헤프너는 여성들을 억압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브라운밀러는 헤프너의 플레이보이 맨션에 살았던 홀리 매디슨(Holly Madison)의 책 Down the Rabbit Hole을 인용한다. 이 책에서 매디슨은 헤프너가 의무적 섹스와 밤 9시의 통금을 강요했다고 고백했다. 물론 누군가는 매디슨이 헤프너의 집에 들어가 사는 플레이메이트가 되기로 결정한 이상, 그녀는 섹스와 통금이라는 규칙에 동의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녀가 신체적 구속 대신 ‘플레이보이 메이트’로의 명성을 누렸으며 두 성인 사이의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라면 폭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합의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강요된 선택의 상황에서 합의란 ‘우리의 의지에 반하는’(Against Our Will: 브라운밀러의 강간에 관한 책 제목) 것일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 의지를 과잉 재현하고 과대평가한 나머지 자유와 선택의 문제를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스스로를 상어에 동일시한 나머지 쫓기는 물고기에게도 ‘평등하게’ 선택권이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필요한 것은 이 폭력의 구조를,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위치를 상어에서 이동시키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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