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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은 자 모두 유죄?
[201호] 2017년 09월 18일 (월) 최태섭 문화평론가, 『잉여사회』 저자
   
 
     
 

  87년 민주화를 이은 89년 해외여행 자유화와 함께 한국사회의 여행이 시작됐다. 1990년 156만 명으로 시작된 한국인들의 해외여행은, 2016년 2238만 명으로 늘어났다. 외환위기가 찾아왔던 97, 98년과 서브프라임발 금융위기가 덮쳐왔던 08, 09년을 제외하면 해외여행객은 매년 증가했다. 2016년 한국인들이 해외로 나가면서 쓴 여행비용은 26조 8486억 원 가량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국내여행 비용이었던 25조 7480억여 원을 넘어선다. 이미 2001년 이후 한국의 관광수지는 계속해서 적자였다.

  물론 국내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특히 사람과 인프라와 돈이 수도권으로 쏠려있는 한국사회에서, 관광수입은 그나마의 재분배를 가능케 하는 방편이다. 몇몇 지자체에서는 관광객 유치에 사활을 걸고 무리한 사업들을 진행하다 낭패를 보기도 한다. 휴가철의 바가지요금과 서비스, 시설의 미비가 매년마다 구설에 오르지만 앞마당에서 보물을 찾아보려는 국내여행객들의 발걸음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최근 여행 경험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국내보다는 해외다.

  한국인들이 사랑하는 주요 국가들의 관광지는 이미 한국어 안내와 호객행위가 넘쳐난다. 어떤 곳들은 명동이나 인사동, 이태원 같은 서울의 관광명소들과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다. 인터넷과 SNS에는 현지의 언어를 몰라도 불편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자세한 정보가 넘쳐나고, 아직 한국인들의 때가 묻지 않은 청정한 여행지들에 대한 정보도 소곤거리듯 퍼져나간다.

  근면성실하게 일만하면 되었던 때와는 다르게, 오늘날의 한국경제는 소비가 없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게다가 여행의 효과는 소비에서만 그치지 않고, 예전보다 훨씬 복잡해진 노동력의 재생산과, 예전보다 훨씬 중요해진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느 쪽의 입장에서 보던 간에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그러하듯 여행이라는 행위 역시 복잡하고 때로는 뒤틀린 면들을 가지고 있다. 여행이 좋고 즐겁다고 해서 누구나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사람에 따라 목적과 행태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한국인들은 주요 관광객이자 동시에 악질 관광객이다. 안하무인의 태도, 타종교에 대한 지나친 전도, 현지인에 대한 인종차별, 성매매 등 각종 추태들이 20년 넘게 누적된 결과다. 동남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관광명소에서 한글낙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고, 현지인들의 삶의 터전과 방식을 훼손하는 행동들도 심심찮게 문제가 되어왔다.

  물론 비슷한 문제들을 과거 유럽과 북미의 백인들은 더 심각한 차원에서 일으켜왔고, 그때 쌓아올린 기반들을 바탕으로 지금은 다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해야한다고 외치는 세계의 교양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 반면 식민통치와 내전과 독재를 모두 겪은 아시아의 빈곤한 국가였던 한국은 그 백인들로 부터 가해지는 차별과 성매매와 전도와 파괴를 모두 겪었던 나라다. 그리고 지금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여권도둑들이 선호하는 ‘못가는 곳이 별로 없는 여권’을 발행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 기억과 변화는, 어쩌면 추태의 원인으로 지적되곤 하는 한국의 국민성보다 더 정확한, 혹은 그 국민성이라고 불리는 무언가를 규정하는 원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해자였던 한국의 그 어떤 면도 오늘날 가해자가 된 한국의 잘못을 경감해줄 수는 없다. 특히 그 피해자의 모습이 정치적 유불리를 위해 편리하게 동원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정작 그 피해자들은 국가로부터도 외면당했었는데 말이다.

  한편 여행이 한국사회에서 갖게 된 문화적 위상 역시 흥미롭다. 가령 80년대의 청년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난을 받고, 90년대의 청년들이 그 그림자를 떨쳐내기 위해서 배낭을 메고 이곳저곳으로 흩어졌다면, 2000년대의 청년들은 ‘배낭여행도 가지 않는 패기 없는 청춘’이라는 새로운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이후 88만원 세대로 명명될 이 청년들에게 여행은, 그것을 통해 내 삶이 바뀌었다고 면접관들 앞에서 주장해야 하는 새로운 경쟁의 도구이자, 스펙의 일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SNS가 삶속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서부터는, 여행은 ‘내가 나로서 내보이고 싶은 나’를 연출하기 위한 필수적인 풍경이 되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즐거움 자체를 앗아가지는 않을 것이지만, 여행이라는 행위를 경험함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상당부분 규정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유행을 타는데, 최근의 트렌드는 남들이 모두 칭송하는 것을 멀리하고, 길거리에서 사먹은 군것질 같은 것에 쿨 한 찬사를 덧붙이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사달은 우리가 여유를 가질 수 없는 혹독한 시간들을 버텨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속절없는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살기 위해 출국장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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